DJ조문단으로 온 北 "장군님께서 만나길 원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 측이 28일 일부 공개한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알에이치코리아)’ 제5장 ‘원칙 있는 대북정책’에 따르면 북한은 미사일 발사, 핵 실험,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 각종 도발을 일으키면서도 수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했다. 도발과 위협적 언사를 쏟아내다가 갑자기 유화적인 태도로 바꿔 경제 지원을 얻어내는 전형적인 대남 전략이 반복됐다고 이 전 대통령은 기술했다.

○“장군님께서 만나길…”

회고록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 재임 기간(2008년 2월25일~2013년 2월24일) 가운데 맨 처음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한 것은 2009년 8월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김기남 당시 북한 노동당 비서가 조문단을 이끌고 서울에 왔다. 김기남은 이 전 대통령과 면담하고 “장군님(김정일)께서는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이 잘 실천되면 북남 수뇌들이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말씀했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정권이 바뀐다고 이전 정권이 해 놓은 일을 일방적으로 폐기하지 않는다. 김일성 주석과 노태우 전 대통령 간 합의문서도 있고, 이 모든 것이 존중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환기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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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대통령은 “남북 정상이 만나면 그런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야 한다”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꼭 전해줄 말이 있다. 그동안 북한이 ‘북핵은 북·미 간 문제이니 남한은 빠져라, 남한은 경제협력이나 하면 된다’고 주장해왔는데 나는 달리 생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남북 정상이 만나 핵문제를 직접 논의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기남은 “미국이 우리를 적대시하지 않으면 무엇하러 핵 억제력을 가지겠나”라고 주장했다. 이 전 대통령은 다시 한번 핵문제를 의제에서 제외해선 안된다고 했고, 김기남은 “정확하게 (김정일에게)올리겠다”고 대답했다.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은 조문을 통해 정상회담을 제안한 이후 임기 내내 직접 또는 중국을 통해 정상회담을 제안해왔고, 그때마다 정치적 목적 이용 금지, 회담 성사를 조건으로 한 선(先)지원 불가능, 납북자와 국군포로 등 인도주의 문제 해결, 북핵 문제 진전 등을 원칙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조문단이 돌아가고 5일 후 북한은 정상회담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고, 동시에 쌀과 비료 등 상당량의 경제 지원을 조건으로 제시했다”며 “북한이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조건으로는 남북 정상회담을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을 알렸다”고 서술했다.

○원자바오 전 총리 통해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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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17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의에서 원자바오 당시 중국 총리는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정상회담 대가나 조건 없이 만나 핵문제를 비롯해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김 위원장을 만나겠다”고 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김 위원장의 건강 문제 등을 들어 평양에서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고, 이 전 대통령은 “다른 문제만 관철된다면 장소는 양보할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의 제의로 그해 10월 정상회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은 싱가포르에서 마주 앉았다. 북한은 국군 포로 한두 명을 영구 귀환이 아닌 고향 방문으로 할 수 있다고 했고, 한국으로부터 쌀과 비료 등 대규모 경제 지원 약속을 요구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래선 안 되겠다”며 협상 중단을 지시했다.

2009년 10월24일 태국 후아힌에서 열린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도 원자바오 총리는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김 위원장의 뜻을 이 전 대통령에게 전했다.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의 전제조건이 까다롭다며 사실상 거절했다.

○“서울 다녀간 북한 정보요원 처형”

2010년 우리 측 국정원 고위 관계자가 평양을 방문했다. 북측은 천안함 폭침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전 대통령은 “46명이 무고하게 목숨을 잃었는데, 애매한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북한은 쌀 50만 지원을 요구해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해 11월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후 북한 보위부 고위 인사가 서울에 왔다. 남북은 정상회담에 대한 상당한 진전을 이뤘지만 북한 측 인사는 평양에 간 뒤 공개 처형당하면서 회담은 유야무야됐다. 서울에 예정보다 하루 더 체류하며 이 전 대통령과 면담 요청을 성사시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졌다는 것이다.

2011년에도 베이징 등에서 정상회담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회담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 전 대통령은 “북한은 남측이 정상회담을 구걸하며 돈 봉투를 건넸다고 억지를 썼다”고 했다.

도병욱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