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독한 눈높이' 피할 데 없다
2009년 10월 뉴욕에서 만난 삼성전자 미국법인 임직원들은 불안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소니를 제치고 TV시장에서 글로벌 1등에 오를 것이라는 자신감을 말하면서도 심상치 않은 ‘아이폰 태풍’을 걱정했다. 젊은 층의 마음을 사로잡은 애플의 킬러 콘텐츠 애플리케이션(앱) 얘기에 이르러선 어쩔 수 없는 무력함까지 털어놨다.

창업 40년 만에 ‘몽골 이후 최고의 진격’(2009년 10월26일자 한경 A1면 톱) 신화를 작성한 삼성전자가 아니던가. 그해 11월 KT가 삼성 경쟁사인 애플의 아이폰을 전격적으로 국내로 들여왔을 때 그 ‘공포’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싸움의 판을 바꿔 놓고 새로운 소비자들의 열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이폰과 스티브 잡스의 독주에 감히 맞설 수 있을까.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삼성 특검’ 결과에 책임을 지고 근 2년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이건희 회장은 2010년 3월24일 또 한 번의 승부수를 던진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라는 게 그의 경영복귀 일성이었다. “다시 시작해야 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며 조직을 다잡았다. 컨트롤타워 복원, 새벽 출근, 책임을 묻는 수시 경영진 임원 인사로 분위기를 확 바꿨다.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모욕을 당하며 벼랑 끝으로 몰린 옴니아를 갤럭시S로 혁신해 아이폰 대항마로 만들어냈고 비로소 소비자들의 냉정한 눈높이를 따라잡았다. 자신감을 회복한 임직원들의 헌신과 분투에 힘입어 삼성 전성시대는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금세기 최고의 명승부를 진두지휘하다 몸과 마음이 지친 이 회장은 3주를 넘기며 병마와 싸우고 있다. 크나큰 국가적 불운(不運) 중 하나다.

‘세월호 참사’ 이후 나라 꼴이 도대체 이게 뭐냐는 탄식이 쏟아진다. 박근혜 대통령의 적폐 철폐, 책임내각 구현, 국가개조 의지와 약속은 돈 앞에 무너진 ‘국민검사’에 발목이 잡혀 한 발도 떼 보지 못했다.

6·4선거는 국가개조의 출발선

“초임 검사 때부터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던 총리 후보자조차 낡은 집에서 고생하며 살아온 가족에게 미안해 돈을 벌기로 작정하는 게 우리 지도층의 수준이자 현실이다. 권위와 신뢰를 잃은 리더십을 복원할 수 있는 ‘신의 한 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상대적 빈곤에 배고파하는 가족들로부터 ‘잘난 아들, 잘나가는 남편은 나라의 아들, 남의 편’이라는 푸념을 듣고 있는 공직자들을 적폐의 주범으로만 윽박지를 수도 없다. 100점짜리 총리 후보를 찾기 전에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봐야 한다. 매섭게 높아진 국민들의 기대치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남 탓하기에 앞서 자책(自責)하고, 분수를 깨닫는 게 먼저다.

이틀 앞으로 다가온 6·4 지방선거는 주인들이 대한민국의 명운을 바꿀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다. 군림하려는 후보, 기득권을 지키며 변화를 피하려는 후보, 세월을 탓하고 숨어 있는 표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 후보,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후보, 무엇보다 국민적 슬픔과 분노, 국가적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달콤한 공약을 늘어놓는 후보…. 이런 자들을 들어낼 수 있는 지독한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머뭇거리지 말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유근석 편집국 부국장 y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