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분노의 정치, 품격의 정치
분노는 인류 생존에 필요한 기능을 한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것도 중용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레지스탕스인 스테판 에셀은 저서 ‘분노하라’에서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있는 것처럼,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했다. 분노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수단, 사회 발전의 자극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분노는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한 강력한 자기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말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의 언행은 거칠기 일쑤다. 지난해 우리 정치권에선 막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사람을 이르는 ‘귀태(鬼胎)’라고 했고,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와의 회담에서 ‘쾅’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며 “누가 죽나 한번 보자”고 소리쳤다.

정치권, 끊이지 않는 막말

새누리당의 전력도 만만치 않다.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르륵…(1998년 당시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노가리(2004년 한나라당 의원들의 ‘환생경제’ 연극)” 등이 대표적 예다. 2009년 천정배 당시 민주당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쥐박이’라고 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2012년 대선을 되돌아 보는 ‘1219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썼다. 진보적 가치에 동의하면서도 막말이나 거친 태도를 싫어하는 성향을 ‘태도보수’라고 하는데, 대선에서 민주당이 ‘태도보수’의 유탄을 맞았다는 이낙연 민주당 의원의 대선 패배 분석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문 의원도 대선 재도전 의지를 드러내면서 “정부의 종북몰이에 제일 ‘분노’한다”고 했다.

분노에도 품격이 있어야

정치인의 진정한 카리스마는 말에서 나온다. 분노에 정복당하는 순간 이성적 논의 구조는 사라진다. 처칠은 숱한 명언으로 전쟁으로 지친 영국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희망을 심어줬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지난 연말 국회를 방문해 자신의 50여년 정치사를 회고하면서 “공자께서 말씀하신 사무사(思無邪) 자세로 평생 살아왔다”고 했다. 터무니 없는 생각과 행동을 삼가고 인간다운 도리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을 지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엔 절제의 미가 없다. 전투적 용어가 득세한다. 분노할 땐 분노해야 하나 품격이 있어야 한다. 분노의 화살은 곧 자신을 겨누는 비수가 된다. 플라톤은 분노가 선과 숭고함을 지향할 수 있는 고상한 ‘티모스(기개)’라는 덕목으로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분노 자체가 목적이어선 안된다는 얘기다. 우리 정치권의 분노가 과연 이런 숭고한 목적을 갖고 있는가.

새해 들어 정치권의 막말 추방 약속이 잇따르고 있다. 민주당은 막말 추방을 3대 프로젝트 일환으로 채택했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도 지난 2일 “막말 증오 등 낡은 정치행태가 새해에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약속을 지켰는지 여부는 연말에 알 수 있다. 새해에는 정치인들의 멋들어진 말의 향기로 정치 불신을 조금이라도 회복했으면 한다.

홍영식 정치부장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