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선진화법, 후진화법
요즘 청와대 참모들과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를 만나면 한결같이 장탄식을 늘어놓는다. 국정감사 이후 국회 주요 법안 처리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걱정부터 앞선다는 것이다.

국회에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이 제대로 될지 여부를 가늠하는 주요한 법안들이 대거 상정돼 있다. 내년도 예산안은 물론이고 부동산활성화법안, 세법개정안, 외국인투자촉진법, 통상임금 관련법안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앞길이 구만리다. ‘국회선진화법’ 때문이다. 선진화법 태생 과정은 이렇다. 지난해 4월 총선 전 새누리당은 승리를 확신하지 못했다. 직권 상정과 날치기를 몰아내자며 이른바 ‘몸싸움 방지법’이라는 선진화법 개정 발의를 주도했다. 선진화법은 천재지변, 전시·사변 때나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의안의 신속처리제를 도입했다.

다수결 원칙 근간 흔들어

신속처리 요구 의결은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이 찬성해야 가능하도록 했다. 즉,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찬성이 없으면 안건을 직권상정조차 할 수 없다. 각 상임위에서도 여야가 이견이 있는 법안의 통과 요건을 5분의 3 이상 찬성으로 규정했다.

다수결 원칙의 민주주의 근간을 흔든다는 점에서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거센 비판에 직면했지만 지도부의 강한 의지에 밀렸다. 새누리당이 총선에서 과반을 겨우 넘는 의석(152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정치적 교착 상황을 예고한 것이다. 그러자 새누리당 일각에선 다수결의 기준은 과반수라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 심사를 제청하기 위한 법리검토에 착수했다.

그런데 어쩌랴. 그건 장기전에 해당된다. 당장 12월까지 주요법안을 처리해야 하지만 그때까지 선진화법을 뒤집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여권은 뾰족한 길이 보이지 않는다. 장외에서 국회로 돌아온 민주당은 원내 투쟁 강도를 극대화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선진화법이란 큰 무기가 뒤에서 떡하니 버텨주니 민주당은 협상의 우월권을 확실히 틀어쥐었다. 새누리당 고위 관계자는 “이미 협상력에서 우리는 80점은 까먹고 있다”고 토로했다. 평소 유(柔)하다는 소리를 듣던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가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격한 반응을 내놓은 것은 이런 정황들을 감안한 걱정이다.

투쟁 수단으로 삼을땐 역풍

다수결 원칙은 배제되고 합의라는 수단밖에 남지 않았지만 지난달 3자회동에서 확인했듯, 박근혜 대통령은 원칙론을 내세운다. 강경한 야당과 박 대통령의 원칙론 사이의 간극은 멀어도 너무 멀다는 게 새누리당 원내대표단의 큰 고민이다.

그렇지만 꼬인 현안을 푸는 게 정치력이다. 현재로선 여야가 타협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유일한 길이다. 미국의 외교 협상 전문가인 리처드 홀브룩은 “목표에는 단호하고 수단에는 유연하라”고 했다. 현 여야의 대표와 원내대표는 비교적 합리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어 타협이 불가능한 조합은 아니다.

여당의 정치력 발휘 못지않게 야당은 다수결 원칙이라는 민주주의 기본을 존중해야 한다. 선진화법을 장내 투쟁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아선 안된다. 법은 선진화를 지향하고 있는데, 그 운영을 후진적으로 한다면 거센 여론의 역풍에 직면할 것이다.

홍영식 정치부장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