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삼권분립 위협하는 독주

부동산 등 민생법안 '정쟁 볼모'로 잡혀 표류
"이럴바엔 차라리 의원내각제가 낫다" 푸념도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ch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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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성곤 민주당 의원(전남 여수갑)은 외국 기업과 합작하는 경우 지주회사의 증손회사 설립을 손쉽게 하는 내용의 외국인투자촉진법(외촉법) 개정안을 내려다 당내 반발에 백지화했다. 치열한 대치 정국에서 여야 의원 20명이 투자 활성화를 위해 모처럼 뜻을 같이했지만 경제민주화를 앞세운 민주당의 당론에 가로막혔다. 총 2조3000억원 규모의 투자가 걸려 있는 법안이지만 현재로선 처리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2. 대기업 계열사 간 부당 내부거래를 규제하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법(공정거래법)’은 지난 7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 법안은 19대 들어 여야 간 정치타협의 미학을 보여준 대표적 입법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공정거래위원회가 시행령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야는 규제 수위를 놓고 한동안 갑론을박을 벌였다. 시행령은 정부 고유 권한인데도 국회가 나서 ‘감놔라, 배놔라’를 반복했다.

국회 독주에 삼권분립 정신마저 흔들리고 있다. ‘통법부’ ‘거수기 국회’라는 말은 옛말이다. 정부가 고민 끝에 낸 법안도 국회가 반대하면 그냥 발이 묶이고 만다. ‘브레이크 없는 권력’이란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18대 국회 때만 해도 과반 의석의 여당이 밀어붙이면 안 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 여당 대선주자들이 노동법 단독 처리를 주문한 청와대의 지시 한마디를 따라 ‘새벽버스’에 올라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수’를 앞세운 변칙적인 법안 처리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날치기 처리’ ‘폭력국회’ 등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난해 도입된 국회선진화법은 국회 권력을 더 키우기만 했다. 5분의 3 이상 의원이 찬성해야 법안 상정이 가능하도록 ‘선진화법’을 수용할 만큼 한국의 국회가 ‘선진적’이지 않은 탓이다.

이제 국회가 반대하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대통령 당선인이 정부 조직을 원하는 대로 꾸리기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박근혜 정부가 야당의 반대로 정부조직법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52일이나 됐다. 당시 정부 내에선 “일단 일은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팽배했다.

지금도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 ‘국회선진화법’은 ‘식물국회법’으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외촉법’뿐만 아니라 세법 개정안, 상법 개정안, 부동산 대책 등 시급한 민생경제 현안들이 정쟁의 ‘볼모’로 잡혀 있다. 국정원 대선개입 댓글 사건을 시작으로 채동욱 전 검찰총장 혼외아들 의혹, 정상회담 대화록 실종 등을 놓고 여야가 치열한 난타전을 벌이면서 민생법안은 표류하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이럴 바엔 차라리 의원내각제가 낫다”고 푸념할 정도다.

김기현 새누리당 정책위 의장도 기자와 만나 “사상 최악의 ‘입법 보이콧’ 사태가 우려된다”며 “민생법안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선진화법과 야당의 비협조 등을 감안할 때 시한 내 예산안 처리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정부가 제출한 법안이 국회에서 원안의 형체가 사라질 정도로 누더기가 되는 반면 국회는 무리한 법안을 홍수처럼 쏟아내고 있다. 19대 들어 현재까지 의원발의 건수는 6479건으로 정부 제출 법안(300건)의 20배가 넘는다. 수시로 장관들을 국회로 불러 호통치고 기업인들을 마구잡이로 청문회에 불러내 ‘망신’을 주는 일이 다반사인데도 정작 국회에 대한 견제장치는 없다.

지난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영유아보육법 개정안처럼 ‘처분적 법률’을 내는 일도 한다. 무상보육 사업에 드는 돈 가운데 중앙정부가 분담해야 할 비율(서울의 경우 40%, 나머지 지역은 70%)을 명시한 법안이다.

■특별취재팀

손성태 차장, 김재후 이태훈 기자(이상 정치부), 주용석 차장대우, 런던·스톡홀름=김주완 기자(이상 경제부), 이태명 기자(산업부), 장진모 워싱턴 ·안재석 도쿄 특파원, 남윤선 기자(이상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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