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 김종훈, 15세때 이민간 벤처신화 ‘한국의 미래’ 연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 김종훈, 15세때 이민간 벤처신화 ‘한국의 미래’ 연다
한국의 미래 성장동력을 설계할 새 정부 미래창조과학부의 첫 수장으로 김종훈 알카텔-루슨트 최고전략책임자(CSO·53)가 발탁됐다. 김 장관 후보자는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 최고 민간 연구·개발(R&D) 기관인 알카텔-루슨트 벨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미국 이민 1.5세대 한국인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정부조직 개편 핵심 부처 장관직에 이민자 출신을 발탁했다는 점에서 ‘파격 인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후보자는 17일 밤 기자들과 만나 “새로운 일자리와 미래산업을 창출하는 것이 미래창조과학부의 업무이자, 나 자신의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며 “임무가 막중하지만 과학과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이 생산적으로 융합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도전적 정신과 봉사하는 마음으로 다같이 힘을 합쳐 국민들께 약속한 정책들을 실천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김 후보자는 중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가난을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갔다. 그의 가족이 정착한 곳은 메릴랜드의 빈민촌. 이민은 역경의 나날이었다. 가난은 물론 언어장벽, 인종차별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신문배달과 편의점·주방보조 아르바이트 등 밤새 일해 학비를 벌었다. 일이 끝나면 학교로 달려갔다. 잠은 수업 후 2시간가량 자는 게 전부였다. 잠이 부족한 탓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죽기살기로 공부한 끝에 그는 미국 명문 존스홉킨스대 전자공학과에 진학, 기술경영학 석사학위까지 따냈다. 메릴랜드대에서는 보통 4~6년 걸리는 공학박사 학위 과정을 최단기인 2년에 해치웠다. 이 기록은 아직도 전설로 통한다. 몸에 밴 부지런함이 그의 무기였다. 논문 준비에 파묻혀 오전 2시를 오후 2시로 착각, 점심을 먹으려 했던 일화도 있다.

1992년 32세였던 김종훈 후보자는 수많은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벤처회사를 설립했다. 이름은 유리시스템즈였다. 큰딸 이름(유리)을 땄다. 당시 그는 “5년 안에 10억달러 가치의 회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꿈 같은 목표였다. 그러나 그는 꿈을 이뤄냈다. 미국 해군 핵잠수함 장교로 7년간 복무한 경험을 살려 ATM이라는 군사 통신장비를 개발했다. 서로 다른 통신 네트워크(무선·구리선·광케이블) 사이에서도 데이터가 제대로 전달되게 하는 신기술이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미군 전투기들이 위성 등 다른 네트워크에서 오는 데이터를 제대로 수신하지 못해 적군의 전투기를 놓친 경우가 있다는 데서 착안했다.

1998년 이 장비 상용화에 성공한 그는 유리시스템즈를 세계적인 통신장비업체 루슨트테크놀로지스(현재의 알카텔-루슨트)에 매각했다. 매각 대금은 10억달러(약 1조800억원)였다. 이 거래로 그는 38세의 나이에 미국 400대 부자가 됐다.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 김종훈, 15세때 이민간 벤처신화 ‘한국의 미래’ 연다

○‘노벨상 산실’ 벨연구소 최연소 CEO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도 김 후보자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루슨트로 스카우트된 그는 광네트워크 부문 사장 등을 맡아 글로벌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박사 학위를 땄던 메릴랜드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2005년 벤처 경영인과 교수를 거친 그는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을 제의를 받았다. 수년간 성과를 내지 못해 위기에 처한 벨연구소 사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벨연구소는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의 이름을 따 1925년 설립된 민간연구소다. 전기통신 부문과 기초과학기술을 주로 연구한다. 지금까지 1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 3만개가 넘는 특허를 갖고 있다. 미국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이유다.

당시까지만 해도 외부 출신이 벨연구소 사장직을 맡은 사례는 없었다. 벨연구소는 불굴의 의지와 혁신, 도전정신의 아이콘인 김 후보자를 영입해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김 후보자는 수차례 고사했다.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벨연구소는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3개월간 연구소 사장 자리를 공석으로 놔뒀다. 삼고초려 끝에 김 후보자는 외부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최연소 나이에 벨연구소 사장을 맡았다. 그는 기대에 부응했다. 연구 실적을 상품화해 재빨리 시장에 내놓는 벤처팀을 만들어 성과를 냈다.

벨연구소에서 그는 직원보다 더 열심히 뛰는 일 중독자로 통한다. 연구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사장실에 앉아 있기보다 직접 찾아가 토론을 즐긴다. 식사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은 빵과 음료로 때우기 일쑤다. 이런 지독한 열정으로 그는 벨연구소를 위기에서 구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죽어가던 연구소를 살아 있는 연구소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김 후보자는 팀 워크를 강조한다. 아무리 잘나고 똑똑한 사람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는 또 직원들에게 “과거를 돌아보지 마라”는 말도 자주 한다. 성공이든 실패든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새롭게 도전하라는 뜻이다. 그는 갑부지만 딸과 함께 비행기를 탈 때는 이코노미석을 탄다. 아이에게 편안함보다 역경을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한국의 미래를 떠맡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 뭔가를 하라.” 김 후보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공의 비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미래창조과학부의 사명과 비슷하다.

미래부 장관직은 그에게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각에서는 김 후보자가 한국의 국회와 업계 풍토 등 국내 시스템 전반에 어두운 데다 국내 인맥이 넓지 않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기술 이전 등에 관한 시스템이 부족하고 정책 추진 과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국회를 잘 설득해야 한다”며 “이런 이해가 부족해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초과학과 정보통신기술(ICT)을 아우르는 미래부를 역동적으로 이끌 수 있는 적임자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벤처기업과 세계 최고 R&D 기관을 이끌어본 경력이 R&D 결과를 실제 산업에 접목해 성과를 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얘기다. 교과부 출신 한 고위 공무원은 “미래부에 주어진 사명은 ICT와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라며 “김 후보자가 혁신의 선구자로 불리는 만큼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