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지하 만인지상' 위상 불구 '의전ㆍ대독 총리'로 머문 경우 많아
김종필, DJP 연대로 실세총리..고건, 盧전대통령과 갈등 막내려
대권길목 인식돼 대통령-총리 갈등사례도..대통령의 통치철학 반영

"정권의 초대 국무총리 인선을 보면 대통령의 통치 철학과 정권의 성격이 보인다."

역대 대통령 당선인이 가장 신경을 쓴 인선은 초대 총리다.

총리의 위상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에 비유될 정도로 막강하다.

헌법은 총리에게 대통령 보좌와 내각 통할, 나아가 장관 제청권과 해임건의권까지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의전총리' `대독총리' `명망가 총리'라는 유행어가 생겨난 것처럼 역대 총리는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빛나는 공은 대통령에게, 궂은 일은 총리에게"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총리는 대통령의 바람막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나마 `실세 총리'라는 말이 나온 것은 1998년 김대중정부 출범 후 김종필 총리가 임명되면서다.

노무현정부는 `책임총리제'를 앞세워 총리의 권한 행사를 지원했다.

결국 총리의 위상과 역할은 대통령의 권력관이나 용인술과 밀접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특히 정권의 초대 총리는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을 제시하는 상징적 의미까지 지녀 정권마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인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책임총리제'를 공약으로 내걸 만큼 총리의 위상 제고에 적극적이다.

대통령 비서실의 기능을 대통령 보좌에 초점을 맞춤에 따라 총리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박 당선인 측이 최근 `호남 총리론' 등 특정지역이 아닌 능력을 위주로 총리를 발탁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도 책임총리제에 대한 박 당선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초대총리는 정권의 얼굴..정권별로 주안점 달라 =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으로 국민이 뽑는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상당 기간 총리의 역할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대통령의 바람막이나 얼굴마담형 성격이 강했다.

대선을 앞두고 정파 간 이합집산에 따른 타협의 산물로 총리가 결정되는 사례도 있었다.

노태우정부의 초대 총리는 이현재 전 서울대 총장이었다.

`보통사람 시대'라는 대선 구호에 걸맞게 거물급 정치총리 대신 서울대 총장 출신을 총리에 앉힌 것이다.

군 출신 인사가 심심찮게 총리를 맡은 이전 군부 독재정권과의 차별화 의지도 반영된 인선이었다.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은 자신의 저서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에서 "이현재 총리는 보통사람의 시대에 어울리는 매우 소탈하고 서민적인 총리였다.

너무나 검소해서 양복도 한 벌, 구두도 한 벌 그야말로 단벌신사였다"고 적었다.

김영삼정부에서는 황인성 전 민자당 총재가 초대 총리를 맡았다.

호남 출신의 경제통 총리를 통해 국민화합과 경제회생의 의지를 피력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육사 4기 출신으로 유신과 군부정권의 요직을 거친 그를 발탁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합당'에 따른 한계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김대중정부에서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초대 총리를 맡은 것은 대선 기간 `김대중-김종필(DJP) 연대'라는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다.

총리를 비롯한 경제ㆍ통일ㆍ외교 분야의 내각 추천권을 자민련에 주기로 한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자민련은 `공동여당 포기'를 선언한 2000년까지 박태준 이한동 총리를 연이어 배출했다.

이런 연유로 김 전 총리는 각종 정책 결정과정에 적극 개입하는가 하면, 국무조정실의 위상을 대폭 강화해 실세총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다만 DJP연대로 일정한 지분을 얻은 결과이지,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반영된 `실세 총리'로 보긴 어렵다는 한계도 분명했다.

노무현정부는 노 전 대통령의 강한 개혁 이미지를 보완할 안정형 인물로 김영삼정부의 마지막 총리였던 보수 성향의 고건 전 총리가 발탁했다.

이른바 `몽돌과 나무받침대론'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책임총리제를 국정운영의 방향으로 제시했지만 고 전 총리가 얼마나 실세 역할을 했는지는 평가가 엇갈린다.

청와대에서 "총리가 소신이 없다"는 불만을 내놓고, 총리실에서는 "청와대 사람들과 코드 맞추기가 어렵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렸다.

결국 고 전 총리는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복귀한 뒤 후임 개각을 위한 각료제청권 행사를 요청했지만 이를 뿌리치고 총리에서 물러나는 갈등 관계로 끝을 맺었다.

한승수 전 총리는 이명박정부의 초대 재상이었다.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 구상에 걸맞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없는 한 전 총리를 발탁한 것이다.

경제, 외교 분야의 3개 장관을 역임하고 대통령 비서실장, 3선 국회의원 등 전문성과 정무 능력을 인정한 결과였다.

그러나 청와대 비서실의 정부 장악력이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한 전 총리의 총리실 위상을 낮아졌다는 평가가 많다.

이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대통령이나 총리는 각자 역할이 있고 총리는 앞으로 세계 시장에 다니면서 자원외교 등 여러 분야에서 해야 할 역할이 많다"고 언급한 것처럼 한 전 총리는 `자원외교형'으로 역할이 국한됐다는 말까지 들었다.

한 전 총리를 이은 정운찬 전 총리가 `세종시 총리'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총리에게 국정 전반의 통할권을 넓게 부여하기보다 굵직한 현안 중심으로 사람을 발탁하는 이 대통령의 용인술이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총리는 잠룡 사관학교..대통령과 갈등빚기도 = 국정의 2인자라는 특성상 총리가 정치적 두각을 나타내며 대권을 향한 길목으로 작용한 사례도 종종 있다.

이는 대통령과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영삼정부 때 이회창 전 총리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때 여당 총재인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경고문을 보낼 정도로 강단을 보였던 그는 김영삼정부의 초대 감사원장에 임명됐다.

그는 국방부 율곡사업, 평화의댐 감사를 강행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서면조사하고 전직 국방부장관 등을 수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추진력을 보였다.

이 전 총리는 김영삼정부의 두 번째 총리로 발탁됐지만 헌법상 위임된 총리의 권한 행사 문제를 놓고 김 전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다.

결국 이 전 총리는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한다"며 4개월여 만에 사표를 냈고, 오히려 국민들에게는 `대쪽' 이미지를 심어줘 여권의 유력 대선 후보로 급부상했다.

고건 전 총리도 총리 재직 경험을 통해 대선후보로 성장한 경우다.

고 전 총리는 2006년말까지 당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박근혜 이명박 대선후보를 앞설 정도로 유력 주자였다.

그러나 참여정부 청와대와 형성된 불편한 관계가 갈등 요인이 됐다.

노 전 대통령은 2006년말 고 전 총리의 출마설이 파다할 때 "(총리 기용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고 비판했고, 고 전 총리는 "자가당착이자 자기부정"이라고 맞받아쳤지만 결국 2007년 1월 불출마를 선언했다.

명실상부한 책임총리 권한을 행사한 이는 이해찬 전 총리다.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으로서 참여정부의 2대 총리에 오른 그는 내각을 쥐락펴락하는 `실세총리'의 모습을 보여줬다.

부총리ㆍ책임장관회의를 비롯해 국정운영 방향을 협의조정하는 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실제로 행정수도 건설, 방폐장 문제 등 굵직굵직한 국가현안을 총리실이 주도해 `분권형 국정운영'의 기틀을 닦았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노 전 대통령도 "나와 천생연분이다", "정말 유능하다"는 평가를 하며 힘을 실어줬다.

이 전 총리는 2007년 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까지 출마했지만 참여정부 심판론, 친노(친노무현) 책임론에 묻혀 뜻을 접어야 했다.

이밖에 김영삼정부의 이홍구 이수성 전 총리는 1997년 신한국당 경선 때 9명의 대선 후보군인 `9룡'에 포함되고, 참여정부의 한명숙 전 총리도 대선 주자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류지복 기자 jbry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