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MB에 세종시 국민투표 세번 건의"…靑 "지면 레임덕" 반대
2009년 9월3일 오전 청와대 본관 집무실 앞. 박형준 정무수석과 이동관 홍보수석이 이명박 대통령을 단독 면담 중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30분 정도의 독대가 끝난 뒤 대통령으로부터 국무총리 내정을 받은 정 전 총장이 문 밖으로 나왔다. 박 수석은 정 전 총장에게 “오늘 오후 총리 내정이 발표되면 기자들이 학교로 몰려갈 겁니다. 질문을 하면 한두 가지만 가볍게 받아주시죠”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총리 인준이 이뤄지기 전까지 가급적 발언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당부였다.

서울대로 돌아온 정 전 총장은 마지막 수업을 마친 뒤 강의실 밖에서 기다리던 기자들과 즉석 회견을 가졌다. 질의응답이 몇 개 오간 뒤 KBS 기자가 “행정복합도시(세종시)를 원안대로 추진할 의지가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정 전 총장은 평소 소신을 주저없이 말했다. “행정복합도시는 경제학자인 제 눈으로 보기에 아주 효율적인 플랜은 아니다. 이미 계획을 발표했고 사업도 많이 시작했기 때문에 원점으로 돌리기는 어렵지만, 원안대로 다 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고 본다. 원안보다 수정안으로 가지 않을까 본다.”

회견장은 크게 술렁였다. 곧바로 언론은 ‘충청도 출신인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의 총대를 멨다’ ‘세종시 수정으로 정 총리를 대권 후보로 키우겠다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이라는 등의 보도를 쏟아냈다

이후 1년 가까이 계속된 ‘세종시 수정 논란’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정 총리의 ‘올인’으로 국민투표까지 거론된 세종시 수정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정 총리의 섣부른 발표와 그를 견제한 박근혜 의원 측의 반대가 낳은 결과였다.

◆MB, 정운찬에 서울시장 제안도

정운찬 "MB에 세종시 국민투표 세번 건의"…靑 "지면 레임덕" 반대
세종시 수정 논란은 정 전 총장의 총리 발탁에서 비롯됐다. 일각에선 그의 총리 기용이 세종시 수정 추진을 위한 목적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는 게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정무수석이었던 박형준의 회고. “이 대통령은 2009년 ‘친서민 중도실용’으로 국정기조를 틀고 나서 이를 실현할 총리를 찾았다. 처음엔 호남 출신을 고려하다가 마땅한 인물을 못 찾고, 그동안 염두에 뒀던 정 전 총장에게 오퍼를 낸 것이다.”

정 전 총장에 대해선 이 대통령도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정운찬의 증언.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일 때부터 여러 번 접촉이 있었다. 이 대통령은 2006년 서울시장을 그만둘 때 나에게 시장 선거에 나와 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

정 전 총장에게 이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은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이 맡았다. 곽승준의 증언. “‘대통령께서 교수님과 같이 일하고 싶어 하신다’고 전하자 정 전 총장은 ‘내가 신문에 비판적인 칼럼을 써서 대통령이 불쾌해 했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냐’며 시큰둥해 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찾아가서 설득해 어렵게 수락을 받아냈다.”

◆준비 안 된 ‘세종시 수정’ 발언

삼고초려 끝에 총리로 내정한 정 전 총장이 서울대 회견에서 ‘세종시 수정론’을 언급하자 청와대는 발칵 뒤집혔다. 박형준의 증언. “뉴스로 정 총리의 세종시 수정 발언을 듣고 깜짝 놀랐다. 세종시 수정은 총리가 된 다음 과학비즈니스벨트 등 대안을 마련해놓고 조심스럽게 추진해야 했다. 여당 내 역학 구도도 생각해야 하는 복잡한 문제였다. 그런데 정 총리가 그런 계산없이 기자 질문에 불쑥 말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일이 꼬였다.”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정 전 총리의 병역문제가 걸림돌이 되자 총리실이 세종시 논란을 부각시켰다는 증언도 있다. 당시 총리실 사무차관이었던 조원동의 회고(현 조세연구원장). “정 총리 내정자가 국회 청문회도 통과하기 전에 ‘세종시 총리’로 나설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병역문제와 모 회사로부터 개인적 후원을 받았다는 악재가 잇따라 터지면서 청문회 통과가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종시 논란을 더 키운 측면도 있다.” 어렵사리 청문회를 통과한 정 총리는 “세종시 문제 해결에 명예를 걸겠다”며 각오를 다졌지만, 이미 첫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상태였다.

◆친박계 반대가 결정적

특히 정 총리가 대권 주자로 부각된 것이 여당 내 친박계의 반발을 불렀다.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은 정 전 총장을 총리 내정자로 발표하면서 기자들에게 “정 총리가 대선 후보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파문이 커지자 발언을 취소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나라당 친박계는 ‘세종시 수정=정 총리 대권 후보 부상’으로 이해했다. 박근혜 의원이 10월23일 세종시 수정론에 반대 입장을 공식 표명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정 총리는 야당보다 박 의원부터 설득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정운찬의 회고. “친박계 모 의원한테 ‘박 의원을 만나 설득하고 싶다’고 했더니 ‘이해와 협조를 구해야지, 무슨 설득이냐’며 면박만 당했다.” 박형준의 증언. “이미 그 때는 한나라당이 두 개로 갈라진 상황이었다. 이 대통령과 박 의원의 관계만 좋았어도 무슨 방법이 있었을텐데, 그렇지 못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정무라인이 소극적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곽승준의 증언. “청와대 정무라인이 적극 뛰었다면 친박계를 설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무라인은 정 총리에게 총대를 메게 하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게 아쉽다.”

어쨌든 이 대통령은 11월27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세종시 약속 파기를 사과하고, 수정안 추진을 천명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정 총리가 2010년 1월11일 발표한 세종시 발전 방안 역시 역부족이었다. 그러던 중 2010년 3월26일 천안함 침몰 사건이 터지고, 6월2일 한나라당이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세종시 수정은 추진 동력을 잃는다.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됐던 국민투표도 실시되지 못했다. 정운찬의 증언. “난 2010년 2월, 4월, 6월 등 세 번이나 ‘국민투표에 부치자’고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청와대 참모들은 ‘국민투표에서 졌을 경우 밀려올 레임덕을 어떻게 감당할거냐’며 반대했다.” 결국 2010년 6월29일 ‘세종시 수정안’은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돼 ‘없었던 일’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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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일 출범한 세종시는 정부 직할의 17번째 광역자치단체다. 관할 구역은 연기군 전역(361.4㎢)과 공주시(77.6㎢), 청원군(27.2㎢) 일부를 흡수한 465.2㎢로 서울의 4분의 3 크기다. 2010년 12월27일 공포된 ‘세종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설치됐다. 세종시는 관할구역에 시·군·구 등 기초지방자치단체를 두지 않는 단층제 자치단체이기도 하다. 광역·기초 사무를 동시에 수행한다.

행정도시인 세종시로 올해부터 2014년까지 3년에 걸쳐 16개 중앙행정기관과 20개 소속기관이 대거 이전한다. 지난 9월14일 국무총리실을 시작으로 연말까지 기획재정부 농림수산식품부 공정거래위원회 등 6개 부처와 조세심판원 등 6개 소속기관이 세종시로 자리를 옮긴다. 내년 말까지는 지식경제부 보건복지부 교육과학기술부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이사를 간다. 2014년에는 법제처 국민권익위원회 국세청 등이 이전한다. 정부는 완공 시점인 2030년까지 세종시를 인구 50만명이 자급자족하는 도시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특별취재팀 차병석 정치부 차장(팀장), 이심기 경제부 차장, 서욱진 산업부 차장, 류시훈 금융부 기자 mbnomic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