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윈 퓰너 "정부가 승자·패자 결정하는 건 시장경제에 대한 도전"
“경제민주화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시장경제에 참여해 동등한 경쟁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본질이다.”

에드윈 퓰너 미국 헤리티지재단 이사장은 지갑에서 1달러짜리 지폐를 꺼내들며 “경제민주화는 바람직한 목표이지만 경쟁에서 똑같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한 표의 권리 행사로 이뤄지지만 경제적 민주주의는 내가 번 돈을 어디에 쓸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선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개입이 늘어나고 있다”며 자유시장경제가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우려했다. ‘기업가 정신’을 복원시켜 기업 투자를 활성화하는 게 경제 회복의 지름길이라고 주문했다.

▷미국 대선(11월6일)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할까.

에드윈 퓰너 "정부가 승자·패자 결정하는 건 시장경제에 대한 도전"
“경제가 승패를 가를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43개월 동안 실업률은 8%를 웃돌았다. 지난달 실업률이 7.8%로 떨어졌지만 구직을 포기한 사람을 감안하면 실질적인 실업률은 13~14%에 이를 것이다. 미국 유권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실업률이다. 공화당의 미트 롬니 후보가 민주당의 오바마 대통령보다 당면한 경제 문제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풀어갈 것으로 생각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재정적자 해소를 위해 부자 증세를 요구하나 롬니 후보는 반대하고 있다.

“미국인 상위 5%가 전체 세금의 60%를 낸다. 부자들이 제 몫을 하지 않고 있다는 오바마 대통령의 지적은 사실이 아니다. 부부 합산 연소득 25만달러(개인은 20만달러) 이상에 대한 소득세율을 올리더라도 세수 증가분은 정부 예산의 4~5일치에 불과하다. 부자증세로 재정적자를 해소하겠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전 국민이 세금을 더 내서 고통을 분담하면 되지 않나.

“모든 국민이 세금을 더 낸다고 하자. 정치인(의회)들은 그 돈을 나라 빚을 갚는 데 쓰지 않고 다른 곳에 사용할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등 전 대통령들이 모두 ‘세금은 적게 올리고 지출은 대폭 줄이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세금만 오르고 지출은 계속 늘어났다. 롬니 후보는 증세가 기업 투자를 위축시켜 경제성장을 둔화시킨다고 본다. 문제는 세금 부족이 아니라 정부의 과도한 지출에 있다. 과잉 복지를 비롯해 정부 지출을 줄여야 한다. 정부 예산의 40%를 빚으로 메우는 상황이다.”

▷한국의 대선 후보들도 복지지출 확대를 외치고 있다.

“후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정책이 될 것이다. 미국의 경우 50년 전에는 은퇴자 1명의 복지비용을 5명이 분담하는 구조였다. 지금은 3명이 분담하고 있고, 20년 뒤에는 2명이 분담해야 한다. 다시 말해 현재 55세 이상은 은퇴 후 지금과 같은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40대부터는 어렵다.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면서 복지비용이 급증해 정부재정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적연금, 메디케어(65세 이상 노인층 의료보험),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험) 등 3대 복지 관련 지출이 이미 예산의 43%에 달한다. 40대가 지금처럼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선 2050년에 소득세와 법인세를 두 배 이상 올려야 한다.”

▷일자리 창출이 최대 복지라고 한다. 오바마와 롬니의 일자리 해법은 어떻게 다른가.

“오바마 대통령은 재정지출 확대와 경기 부양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겠다고 한다. 이건 잘못된 해법이다. 일자리는 정부가 만드는 게 아니다. 기업인들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투자에 나설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생긴다. 세금 인하와 규제 완화로 기업의 투자 활성화를 강조하고 있는 롬니가 올바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오바마는 ‘정부의 낙수효과(trickle-down government)’ 정책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

▷한국도 일자리 창출이 가장 큰 과제다.

“한국과 미국의 일자리 해법이 좀 다를 수 있지만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근본 문제다. 중소기업들은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에 따른 추가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대기업들은 40~50개 세트의 ‘도드-프랭크법(월가개혁법)’으로 금융규제가 어떤 영향을 받을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2주 전에 시카고에서 한 중소기업인을 만났다. 종업원 40명을 두고 있는 그는 ‘직원을 더 뽑고 싶지만 회사 측이 부담해야 할 건강보험 의무가입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어 신규 채용을 망설이고 있다’고 토로했다(오바마케어 시행으로 2014년부터 정규직 50인 이상 기업은 종업원을 의무적으로 건강보험에 가입시켜야 하고 어길 경우 벌금을 내야 한다).”

▷투자 부진은 글로벌 경기침체 영향도 있지 않을까.

“글로벌 경제는 정말 위기다. 중국은 성장세가 꺾였고 유럽 재정위기는 여전하다. 미국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20개국(G20)에 필요한 것은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기업인들이 미래를 예측하면서 현명한 투자를 할 수 있도록 경제 환경을 마련하는 일이다. 기업가 정신을 핵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즉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복원해야 한다. 헤리티지재단이 매년 발표하는 ‘경제자유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에 따르면 지수가 높을수록 1인당 국민소득이 높고, 기업가 정신이 잘 발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세계 31위에 머물고 있다. 부패, 노사문제, 정부지출 등을 올바른 방향으로 풀어가면 한단계 높은 성장을 할 수 있다.”

▷국가별 경제자유지수 산정은 밀턴 프리드먼의 작품인가.

“1995년 자유시장경제주의 주창자인 프리드먼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들었다. 월스트리트저널과 함께 매년 170여개국을 대상으로 개인 및 기업들의 경제적 자유가 정부의 규제에 의해 얼마나 침해받고 있는지를 평가해 발표한다. 프리드먼이 세상을 뜨기 5년 전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세대의 과제는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을 정의(define)하는 것이고, 후대의 과제는 그것을 보존하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개입이 너무 커지고 있다. 정부가 테이블을 깔아주는 역할을 넘어 직접 음식까지 조리하는 상황이다. 경쟁의 승자와 패자까지 결정하려고 한다. 자유시장경제가 큰 도전을 받고 있다.”

박근혜와 21년 지기 '지한파 브레인'…김대중 정부 때 한·미 수교훈장

헤리티지재단은 자유 보수주의 기치를 내걸고 공화당에 정책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민주당 성향으로 진보적인 브루킹스연구소와 쌍벽을 이루는 미국의 양대 싱크탱크다.

에드윈 퓰너 이사장(71)은 1977년부터 헤리티지재단을 이끌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1989년 국내 정치고문을 맡았던 그에게 ‘대통령 시민메달’을 수여하면서 “자유 이념과 그 가치를 바탕으로 미국 정부의 정책 수립에 기여한 자유 보수주의 운동의 선구자”라고 극찬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2007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보수인사 100인’에 그를 선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에 한·미 수교훈장 광화장을 받은 그는 대표적 지한파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퓰너 이사장은 지한파답게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박근혜 후보를 안 지 21년 됐다”는 그는 “박 후보가 선견지명이 있는 리더”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박 후보 진영이 내건 경제민주화와 관련해선 쓴소리를 했다.

퓰너 이사장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시장경제에 참여, 경쟁을 통해 ‘경제적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면서 경제민주화가 ‘대기업 때리기’로 변질되는 것은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경제민주화는 기회의 균등이라는 의미와 같다”며 “정부의 규제와 법규정도 재벌이든 신생 기업이든 공정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제민주화를 한다고 해서 모두가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와 애플의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공정한 경쟁”이라며 “그것도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내 아들도 첫 번째 사업에서는 실패했지만 두 번째 도전에서는 잘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안 후보도 언급했다. 퓰너 이사장은 “그를 잘 모르지만, 그가 컴퓨터 소프트웨어에서 크게 성공한 것은 공정한 기회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라며 “모든 사람들이 그런 기회를 갖는 게 경제민주화”라고 덧붙였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