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이 한·미 통화스와프 추진을 결정한 것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이었다. 2008년 9월14일 미국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신청 열흘 뒤인 24일, 미국이 호주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등 4개국과 통화스와프협정을 체결했다는 외신이 전해졌다.

보도를 접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곧바로 신제윤 재정부 국제업무관리관(차관보)을 불러 “호주도 하는데 한국이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질책했다. 같은날 이성태 한은 총재도 이광주 국제담당 부총재보를 호출해 똑같은 지적을 했다. 이후 신 차관보와 이 부총재보는 각각 다른 카운터파트를 통해 미국 정부와 중앙은행(Fed)의 의중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일단 재정부가 접촉한 미 재무부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미 재무부는 미국이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유럽연합(EU) 일본 영국 스위스 캐나다 등은 모두 신용등급이 한국의 ‘A’보다 몇 단계 높은 ‘AAA’라고 지적했다.

한은이 문을 두드린 Fed 역시 냉담하긴 마찬가지였다. 한은은 Fed로부터 “통화스와프가 뭔지 알기는 하느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걸 실감한 재정부와 한은은 모두 다른 루트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도 촉박했다. 10월13일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와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를 계기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 시기를 놓치면 미국과의 고위급 접촉을 시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회작전’ vs ‘정공법’

재정부의 최우선 접촉 시도 대상은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이었다. 통화스와프의 주체인 Fed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리먼 사태 이후 혼돈에 빠진 미국 금융시장을 수습하느라 제 코가 석 자였다. 한·미 재무장관 회동을 요청한 신 차관보에게 클레이 라우리 재무부 차관보는 “폴슨은 단 1분도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재정부는 월가의 파워맨들을 통해 Fed를 설득하기로 작전을 바꿨다. 신제윤의 회고. “통화스와프 체결의 결정권을 쥔 사람은 세 명이었다. 벤 버냉키 Fed 의장과 돈 콘 수석부의장, 그리고 티머시 가이트너 뉴욕연준 총재였다. 이들을 설득하고 움직일 월가의 권력자들을 찾아야 했다.”

신 차관보에게 이런 보고를 받은 강 장관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가이트너였다. 1997년 말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던 당시 재무부 차관보로 방한했던 그를 재정경제원 차관이던 강 장관이 만난 인연이 있었다. 강 장관은 가이트너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당시 미 재무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을 찍었다.

다시 신제윤의 증언. “강 장관이 루빈과 접촉할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다. 마침 루빈은 씨티그룹 고문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루빈과 강 장관을 연결시켜주는 일은 하영구 한국씨티은행장이 자처했다. 지한파로 알려진 빌 로즈 씨티그룹 부회장을 통해 자리를 주선하기로 한 것이다.”

반면 한은은 우회작전을 쓰지 않고 정공법을 택했다. 통화스와프의 전결권을 갖고 있는 핵심 인물과 담판을 짓는다는 전략을 밀고 나갔다. 담판 대상은 콘 수석부의장이었다.

IMF 연차총회가 열리기 사흘 전인 10월9일 워싱턴을 방문한 이 부총재보는 시내 호텔 대신 시 외곽의 민박집에 짐을 풀었다. 한은 국제담당 임원이 Fed의 고위직을 접촉한다는 사실이 노출될 경우 자칫 통화스와프 추진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워싱턴은 전 세계 중앙은행 총재와 재무장관, 국제기구 고위 관계자들로 넘쳐났다. 첫째도 보안, 둘째도 보안이었다.

다행히 콘과는 10일(금요일) 오후에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Fed 사무실이 아닌 인근의 IMF 미국대표부 사무실에서 콘을 만났다. 이 부총재보는 준비해 간 자료를 꺼내며 말했다. “리먼사태 이후 한 달도 안 돼 미국 은행들이 한국에서 빼간 돈이 500억달러가 넘는다. 아시아로 유동성 위기가 확산되고 있는데 통화스와프를 유럽 국가들하고만 하는 건 불합리하다.” 처음에 난색을 표하던 콘이 30분쯤 지나자 태도를 바꿨다. “한국의 은행이 외화를 조달하는 스프레드(가산금리)가 얼마냐?”(콘 수석부의장) “가격(스프레드)이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양국 간의 협력 문제다.”(이 부총재보)

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Fed와 한은의 실무협상은 시작됐다. 콘과의 면담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이 부총재보는 워싱턴에 도착한 이 총재에게 연락했다. 이광주의 증언. “콘과의 면담 결과를 이 총재에게 전하면서 보안을 강조했다. 특히 재정부의 귀에 들어가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자칫 재정부를 통해 말이 새면 일을 망칠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인지 이 총재는 ‘한·미 통화스와프는 불가능하다’고 기자들에게 연막을 치고 곧바로 귀국해버렸다.”

○“I want SWAP.”

이 부총재보가 콘 수석부의장을 만나 한·미 통화스와프를 설득한 다음날인 10월11일 오후 6시 워싱턴DC 한복판에 있는 IMF 신관 빌딩 1층 회의실. G20 재무장관과 세계 중앙은행 총재회의에 참석한 강 장관은 휴식시간을 틈타 폴슨 장관과 버냉키 의장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리곤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와프를 원한다(I want SWAP).” 강 장관이 뭘 스와프(교환)하자는 건지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자 신 차관보가 달려와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했다. 어쨌든 강 장관의 메시지는 분명히 전해졌다.

강 장관은 공식 연설에서 “위기에 처한 신흥국이 외환보유액을 사용하려면 선진국 채권을 내다팔 수밖에 없다. 그러면 신흥국의 금융불안이 선진국으로 전이되는 ‘리버스 스필 오버(reverse-spill over)’ 현상을 불러올 것”이라며 미국을 압박했다. 그러나 IMF 총회와 G20 재무장관 회의가 끝날 때까지 미국은 한국 정부에 희망적인 답변을 주지 않았다. 결국 강 장관은 ‘플랜B’를 실행하기로 하고 13일 뉴욕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강만수의 회고. “서글펐다. 워싱턴에서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가는데 별 생각이 다 들더라. 대통령에게는 출국하면서 ‘최대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자신은 없었다. 이 총재도 한·미 통화스와프는 불가능하다며 귀국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차에서 내리면서 ‘그래, 일단 부딪쳐보자’고 결심했다.”

○빌 로즈의 전화 낭보

10월14일 오전 10시 뉴욕 맨해튼 센트럴파크 인근의 햄슬리파클레인호텔 비즈니스센터. 루빈 전 장관, 로즈 부회장이 들어섰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강 장관과 신 차관보가 동시에 일어섰다.

강 장관이 먼저 입을 뗐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다. 미국을 위해서도 한·미 통화스와프가 필요하다.” ‘리버스 스필 오버’를 다시 강조하며 한·미 통화스와프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루빈이 힐끗 로즈를 쳐다보자 로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빈이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 맞다(You’re right).” 루빈은 로즈에게 말했다. “오늘 점심 때 가이트너를 만나기로 돼 있지 않나. 강 장관 얘기가 일리가 있다. 내 뜻을 전해달라.”

로즈는 강 장관에게 가이트너와 식사가 끝나면 연락을 주겠다는 얘기를 하고 자리를 떴다. 강 장관은 점심을 룸 서비스로 해결하고 호텔 4004호 객실에서 초조하게 로즈의 전화를 기다렸다. 오후 2시를 조금 넘겨 전화 벨이 울렸다. “잘 됐다. 아직 대외적으로 얘기할 단계는 아니지만 (한·미 통화스와프가) 확실히 가능할 것 같다. 실무적 절차를 밟는 데 10~12일 걸린다니 기다려 보라.”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미 통화스와프는 5부 능선을 넘었다.

특별취재팀 mbnomics@hankyung.com

○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경제신문은 ‘비사(秘史) MB노믹스-이명박 정부 경제실록’을 오늘부터 연재합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인 ‘MB노믹스’를 지금 평가하기는 이른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평가를 위해 기록은 꼭 필요합니다. 지난 4년6개월간 어떤 정책이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추진됐고,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추적하는 것은 언론이 해야 할 의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했든 실패했든,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선택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되짚어 보는 것은 다음 정부의 선택에도 참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이 시리즈는 매주 화·목요일 연재합니다.

○ 특별취재팀

차병석 정치부 차장(팀장), 이심기 경제부 차장, 서욱진 산업부 차장, 류시훈 금융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