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당선자 누구? 진보적 시민운동 개척한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 서울시장 당선자는 시민운동계의 '대부'로 불린다. 그는 1995년 참여연대를 결성했다. 2001년에는 사회적 기업인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세웠다. 2006년부터 정치 · 사회 분야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를 설립해 상임이사로 일했다. 그는 스스로를 '소셜 디자이너'라고 부르며 진보적 아이디어를 통한 사회 변화를 모색해왔다.

경남 창녕 출신인 박 당선자는 경기고를 나와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했다. 1학년 재학 중이던 1975년 유신체제에 항거해 할복한 김상진 씨의 추모식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투옥,제명된 뒤 단국대 사학과로 적을 옮겼다.

그는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검사가 됐지만 1년 만에 사표를 내고 인권변호사로 방향을 틀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미국 문화원 사건,한국민중사 사건,말지 보도지침 사건,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박 당선자는 경기고 선배이자 사법연수원 동기인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1986년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를 만들었다.

이 단체는 2년 뒤 청년변호사협의회(청변)가 가세해 민변으로 확대됐다. 박 당선자의 사법연수원 동기 중에는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있다.

박 당선자는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영국 런던정경대(LSE) 디플로마 과정을 수료한 뒤 미국으로 넘어갔다. 1990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조 변호사의 권유에 따른 것이다. 한국에 돌아온 박 당선자는 1995년 참여연대를 만들면서 본격적인 시민운동 시대를 열었다. 2000년 총선 시민연대 활동 때는 낙천 · 낙선 운동을 주도했다. 시민운동 1세대인 그는 시민사회 네트워크가 단단하다.

2001년엔 아름다운재단을 만들어 기부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때부터 이명박 ·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과 공동사업을 벌이고 포스코 · 풀무원 등 대기업의 사외이사를 맡는 등 대기업과 가까이 지냈다. 박 당선자는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열었다. 시장 · 시의원 양성 프로그램인 '좋은 시장학교'를 통해 지자체장들과 교류를 넓혔고 운동권 출신 의원들과도 인연을 맺었다.

선거기간 내내 대기업 기부금 논란은 박 당선자의 약점으로 꼽혔다. 박 당선자가 사무처장으로 재직했던 참여연대가 비판했던 대기업들이 그가 상임이사로 있던 아름다운재단에 거액을 기부했다는 사실이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됐다.

박 당선자는 비정치인이라는 게 강점으로 작용했다. 지난달 6일 안철수 서울대 교수와의 단일화 선언 이후 5%대였던 그의 지지율이 단번에 50% 안팎으로 뛰어오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시민들로부터 선거자금을 모은 '박원순 펀드'는 개설 52시간 만에 목표액 38억8500만원을 달성하는 저력을 보였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