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총대를 메기로 한 것 같다. 여야 정치권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으니 대신 나서는 모양새다. 정치자금법을 고쳐 기업이나 개인이 정당에 후원금을 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어제 선관위가 내놓은 정치자금법 개정안의 골자다. 한도는 연간 1억5000만원이며 중앙당과 시도당 후원회도 부활시켜 연간 50억원,5억원까지 모금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오는 24,25일 토론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한다는 일정까지 구체화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일체의 정치자금을 받을 수 없도록 한 소위 오세훈 선거법은 7년 만에 폐기된다.

정치자금을 양성화하자는 이번 개정안의 취지 자체에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정당의 형체를 세우고 사무실을 운영하는 등에도 돈이 필요하다. 땅 팔아서 정치하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정치자금 곧 부패'로 규정할 이유도 없다. '깨끗한 정치'라는 명분에 집착해 일체의 후원금을 부정해버린다면 음성적인 부패와 부조리가 더 커질 수도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차라리 양성화해서 투명하게 관리하자는 주장이 계속 제기돼 왔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건 그 제도가 적용되는 환경과 토양을 감안해야 마땅하다. 한국 정치의 낙후된 구조를 생각하면 정치자금 허용이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지지 정당과 정책에 대한 후원금이라기보다는 뇌물이거나 세금, 그것도 아니라면 소위 보험금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 기본적인 문제다. 명단과 금액이 공개되는 상황에서 그 어떤 기업도 정당을 차별해 후원금을 낼 수도 없을 것이다.

정치자금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는 최근의 경과도 우려스럽다. 이달 초 청목회 로비 의혹사건에 면죄부를 주는 방향으로 여야가 정자법 개정에 신속하게 합의했다가 여론에 밀려 일시 후퇴한 상황에서 선관위가 불쑥 개정안을 내놓은 것은 무언가 내밀한 논의가 있었다는 의심의 눈길을 받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국회의원들은 요즘 국민의 혈세를 너무 쉽게, 제멋대로, 그리고 많이 가져다 쓰고 있다. 여기에 정치자금까지 풀겠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