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후퇴' 벌거벗고 얼어 죽은 어머니의 모성애
◆ 1.4후퇴 이야기 하나

며칠째 포성이 들려오고 이웃집들은 이미 피난을 떠났다. 지난 여름에 벌어진 공산학정을 기억하는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군 당국의 소개명령에 살을 애는 엄동설한임에도 한강을 건너 서울을 탈출하였다.

나는 당시에 10살로 우리 집의 장남이었고 나를 포함하여 아이가 넷이어서 아버지가 피난 갈 결심을 못하시는 사이에 서울 송현동 당시 미대사관 뒤 골목에 남은 집은 우리 집 밖에 없는 듯했다.

오전에 밖에 잠시 나갔다 오신 아버지는 우리도 피난을 가기로 결심하셨다. 그날이 1월2일이었는지 3일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한강을 건넌 것이 1월 4일은 아닌듯하다. 왜냐하면 1월 4일 낮에 피난민들이 강을 건넜던 그 가교마저 폭파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불 속에 싱거미싱(재봉틀) 머리 부분과 집에 있는 가족사진 앨범 서너 권을 이불과 같이 싸서 등에 지셨고 어머니는 작년에 태어나 아직 돌이 안된 막내를 업으셨고 손에는 우선 먹을 양식을 들고 여섯 식구가 남대문을 향하여 걸어갔다.

남대문 거리는 마지막 피난을 서두르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강다리는 끊어져 있었지만 군에서 피난민들이 통과할 수 있게 고무보트를 연결하여 가교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피난민들은 모두 한강 가교 쪽으로 몰려갔다.

한강 둑은 가교를 건너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식구가 가교에 진입하였을 때는 해는 이미 떨어졌고 어둠 속의 가교는 사람들과 짐을 실은 손수레나 우마차로 아비규환이었다. 가교를 통과하던 아이들 증 더러는 사람에 밀려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잇따르자 아버지가 이불보를 찢어 줄을 만들어 아이들을 줄줄이 묶어 아버지 허리에 매달았다.

어머니 등에 업힌 막내는 계속 울어대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가 강 가운데를 통과할 무렵에 어머니가 갑자기 우시면서 막내가 이상하다고 하셨다. 막내의 목이 옆으로 쳐져 있었고 아버지가 아이를 흔들어도 보고 뺨을 때려 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는 강을 건넌 후 모래사장에 아이를 묻어주고 가자고 하셨다. 강을 다 건넌 우리는 피난 대열을 이탈하여 아이를 묻을 장소를 찾아 다녔다. 처음에는 모래 사장에 묻으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모래사장에 묻으면 강물이 불으면 떠내려 갈 것 같다고 하시면서 강둑을 넘어 동네 산으로 가자고 하셨다.

그런데 동네를 지나 산 입구에 들어선 순간 아이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우리식구는 너무나 기뻐서 모두 피난 가고 없는 빈집을 찾아 들어가 아이를 내려놓고 어머니가 젖을 물렸다. 우리는 피난을 포기하고 그 집에서 살았다.

그 뒤 바로 중공군이 진주하여 그 동네도 다시 북한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네 이름은 흑석동이었고 동네에는 일제시대에 팠다고 하는 ㄷ자형의 굴이 있어서 피난 가지 않고 남아 있던 동네 주민들은 포성만 들리면 모두 굴속에 숨어서 생명을 유지했다.

약 2개월 뒤 국군과 미군에 의하여 서울이 수복이 되었지만 우리식구는 서울의 가산을 정리하고 고향 대구로 하향하고 말았다. 그때 아버님 말씀은 북괴가 언제 또 처내려 올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북한의 6.25남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당시를 기억하고 계시는 우리의 부모님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셨고 그때에 철없던 아이들이 이젠 노인이 되어 북한을 막연히 동경하고 그들의 선전선동에 솔깃해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혈압이 올라가고 속이 뒤집혀진다.

그때 생매장 될 뻔했던 막내(6.25후에 동생이 둘 더 출생하여 당시의 막내는 넷째)는 얼마 전에 환갑잔치를 했다. 나는 지난 60년간 넷째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고 살았다. 처음에 아버지가 넷째를 백사장에 묻기로 하셨다가 다시 산으로 가자고 할 때 내 생각에는 아무데나 묻어도 마찬가지인데 살을 애는 추위 속에 피난 대열을 이탈하여 다시 산으로 가시는 아버님이 속상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피난민 대열 후미에 인민군이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피난민들과 함께 남하하다가 오산부근에서 국군과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많은 피난민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7남 1녀의 장남이셨으나 6.25전쟁 통에 세 명의 남동생과 한 명의 여동생을 잃으셨고 서울에서 꾸려가시던 공장은 잿더미가 되었다.


◆ 1.4후퇴 이야기 둘

1980년대 눈이 수북이 쌓이도록 내린 어느 추운 겨울 날, 강원도 깊은 산 골짜기를 찾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사람은 미국 사람이었고, 젊은 청년은 한국 사람이었다.

한참 골짜기를 더듬어 들어간 두 사람이 마침내 한 무덤 앞에 섰다. "이곳이 네 어머니가 묻힌 곳이란다" 나이 많은 미국인이 청년에게 말했다.

6.25사변을 맞아 1.4후회를 하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미국 병사가 강원도 깊은 골짜기로 후퇴를 하고 있었는데,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 들어보니 아이 울음소리였다.

울음소리를 따라가 봤더니, 소리는 눈 구덩이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이를 눈에서 꺼내기 위해 눈을 치우던 미국병사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놀란 것은 흰 눈 속에 파묻혀 있는 어머니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피난을 가던 어머니가 깊은 골짜기에서 길을 잃고 추위와 싸우다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 아이를 감싸곤 허리를 꾸부려 아이를 끌어안은 채 얼어 죽고만 것이었다.

미군 병사는 언 땅을 파 어머니를 묻고, 어머니 품에서 울어대던 갓난아이를 데리고가 자기의 아들로 키웠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자, 지난날 있었던 일들을 다 이야기하고 그때 언 땅에 묻었던 청년의 어머니 산소를 찾아온 것이었다.

청년은 눈이 수북이 쌓인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무릎아래 눈을 녹이기 시작했다. 한참 만에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알몸이 되었다. 청년은 무덤 위에 쌓인 눈을 두 손으로 정성스레 모두 치워냈다. 그런 뒤 청년은 자기가 벗은 옷으로 무덤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어머니께 옷을 입혀 드리듯 청년은 어머니의 무덤을 모두 자기 옷으로 덮었다. 그리고는 무덤 위에 쓰러져 통곡을 했다.

"어머니, 그 날 얼마나 추우셨어요.!"



☞ 1.4후퇴 이야기 하나는 내가 겪은 실화이고 1.4후퇴 이야기 둘은 Daum의 어느 카페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온바오 전형구 컬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