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화폐개혁을 단행한 지 만1년이 지났지만 국가의 생필품 배급 체계가 구멍 난 상황에서 물가 급등 등 심각한 후유증만 남겼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당초 북한 당국은 시장에서 중소 상공인들이 쌓아 온 `부(富)'를 무너뜨리고 국가 통제를 회복하겠다는 의도로 특단의 조치를 단행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시장 없이 북한체제가 유지되기 어렵다는 냉엄한 현실만 확인한 꼴이 됐다.

◇ 박남기 총살로 세 달만에 막내려 = 북한이 지난해 11월 말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바꾸는 화폐개혁을 단행한 최대 목적은 이미 퍼질대로 퍼진 `시장'을 죽이는 데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시장경제 요소를 일부 수혈한 2002년의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느슨해진 사회 통제 속에서 시장 거래로 재산을 쌓은 중소 상공인들이 반체제 세력으로 변질될 위험을 차단하고, 경제 부문에서 국가 통제를 재강화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화폐개혁은 또 작년 1월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 정은을 권력 승계자로 공식화하기 위한 정치일정과 맞물려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본격적인 권력이양에 앞서 잠재적 장애물인 `시장세력'을 꺾고, 다수 대중인 노동자들에게는 화폐절상에 따른 `실질임금 인상'의 `당근'을 안겨줘 충성심을 유도하려는 포석이었다는 분석이다.

북한은 화폐개혁 단행에 그치지 않고 올해 1월 중순 주요 도시의 종합시장을 모두 폐쇄해 시장근절 의지를 분명히 했으나, 2월 초부터 일부 시장거래를 다시 허용해 결과적으로 한달도 버티지 못하는 허약함을 드러냈다.

국가배급 체계가 무너진 상황에서 시장을 폐쇄하자 당장 주민들이 먹을 것을 구할 통로가 막히는 결과를 가져와 북한 당국으로서는 폭발 직전의 주민 불만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성적 재화부족을 무시하고 갑자기 단행된 화폐개혁은 당연히 엄청난 인플레로 이어졌고, 그렇지 않아도 심각했던 주민들의 생활고는 일시에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됐다.

대북매체 `좋은벗들'에 따르면 당시 "공급제도 없는데 시장마저 폐쇄하라니 죽으라는 것이냐"며 주민들이 지방의 당사를 찾아가 항의하는 일까지 생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북한 당국은 지난 3월 희생양으로 몰린 박남기 전 당 계획재정부장을 공개처형하는 것으로 사실상 화폐개혁 실패를 인정하고 말았다.

◇ 막을 수 없는 `시장' = 실패로 끝난 화폐개혁을 통해 북한에서 시장은 더 이상 국가공급 체계의 보조 시스템이 아니라 주민들의 `생명선'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주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자리잡은 시장을, 기초식량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국가가 건드리기는 어렵게 된 것이다.

북한 당국이 2002년 `7.1경제관리개선조치'로 모든 상거래가 가능한 대규모 종합시장을 각지에 세운 이후 시장은 어떤 의미에서 국가 공급체계를 능가하는 필수적 시스템으로 뿌리를 내렸다.

북한 내에는 당국의 허가를 받은 종합시장만 300∼350개에 달하고 자생적 장터인 `장마당'과 옮겨다니며 여는 `메뚜기시장' 같은 비인가 시장도 성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에 의존하는 것은 주민뿐 아니라 관료도 마찬가지여서, 당국의 `반시장' 정책이 더더욱 먹혀들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ㆍ도당 간부 같은 고위 관료들도 시장에서 생필품을 구하는 경우가 많고, 주민들이 종합시장 매대를 얻거나 미허가 거래를 무마하기 위해 관료들에게 뇌물을 건네는 일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화폐개혁에서 손을 든 북한은 지난 4월 인민경제계획법을 개정, 국가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경제정책을 끌고갈 것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화폐개혁과 시장폐쇄의 실패로 확인됐듯이 계획경제를 강화하는 `반(反)시장적' 조치들이 제대로 작동할지는 회의적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화폐개혁을 거치면서 북한의 주민들뿐 아니라 리더들도 시장 없이는 북한 경제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면서 "화폐개혁이라는 강한 브레이크로도 시장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또 "고위 관리들도 (시장세력한테) 뇌물을 받는 일이 많아 시장을 줄이거나 없애는 경제정책은 아마 화폐개혁이 마지막일 것"이라면서 "시장을 꼭 없애려면 군대와 같은 물리적 힘으로 억눌러야 하는데 현재 북한 정권이 그 정도의 장악력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nar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