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한해 북핵사태의 흐름은 요철처럼 굴곡이 심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마주 달리는 기관차의 궤도에 올라선 북.미 양국은 '대결'과 '대화'의 양극단을 오가며 한반도를 한해 내내 긴장과 이완의 롤러코스터에 올려놓았다.

새해 벽두만 해도 북.미 관계의 기상도는 그다지 흐리지 않았다.

북한은 스스로 외교적 승리라고 자평하는 1994년 '제네바 합의'의 기억을 되살리며 미 민주당 정권과의 '재회'를 주목했고, 미국 역시 대화와 협상을 중시하는 포용 기조로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눈치였다.

특히 북한은 1월 1일 신년 공동사설에서 "조선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기 위한 우리 공화국의 자주적인 대외정책의 정당성은 날이 갈수록 더욱 힘있게 과시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는 즉각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우호적 메시지로 해석됐다.

또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지난 2월 민간인 신분으로 방북한 스티븐 보즈워스 전 주한 미국대사에게 북.미 양자대화를 원하는 속내를 전달했다.

그러나 실상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갔다.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미국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와 아프가니스탄ㆍ이란 문제가 '발등의 불'이 되면서 북핵 문제가 후순위로 밀려난 탓이다.

조급해진 북한은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 준비에 나서며 미국을 자극했다.

이에 미국은 2월 중순 보즈워스 전 대사를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로 임명하고 방북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4월5일 장거리 로켓 '광명성 2호'를 발사했다.

상황은 대결양상으로 번져갔다.

오바마 대통령은 즉각 '미사일 시험발사'로 규정하며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했다.

유엔은 안보리 전체회의를 열어 북한의 로켓발사를 비난하는 의장성명을 공식 채택했다.

북한은 긴장수위를 가일층 높이고 나섰다.

4월14일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6자회담 불참과 핵시설 원상복구 방침을 발표했고, 2차 핵실험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경고에 꿈쩍이지 않았다.

북한의 벼랑끝 협상전술에 끌려다니지 않으려는 일종의 '전략적 무시' 전략이었다.

양측의 출구없는 대치가 이어지던 끝에 북한은 5월25일 2차 핵실험을 강행하고 말았다.

미국은 즉각 대북제재 절차를 주도하며 북한 옥죄기에 들어갔다.

6월13일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2차 핵실험에 따라 무기금수와 화물검색, 금융제재 등 대북 제재를 담은 결의 1874호를 채택했다.

그러자 북한도 외무성 성명을 통해 추출한 플루토늄의 전량무기화를 선언하며 맞섰다.

한걸음 더 나아가 7월18일 노동신문은 "6자회담은 영원히 종말을 고했다"는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발언을 인용, 보도했다.

양측의 벼랑끝 대치국면 가운데 예기치 못한 변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3월17일 북한과 중국의 접경에서 취재중이던 미국국적의 여기자 2명이 취재도중 북한군에 억류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북한은 이를 '카드'로 활용했다.

북한 중앙재판소는 6월8일 여기자들에게 '조선민족적대죄'를 적용해 12년 노동교화형을 선고했다.

장고를 거듭하던 미국은 결국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카드를 선택했다.

클린턴 전대통령은 8월4일 여기자 석방교섭을 위해 전격 방북,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을 갖고 다음날 여기자들과 함께 '화려하게' 귀환했다.

북한은 클린턴 방북을 기점으로 전방위적 '평화공세'에 나섰다.

보즈워스 대표 초청에 이어 8월 중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평양 초청→8월 하순 김대중 대통령 전대통령 서거시 조문사절단 파견→10월초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의 방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유화적 행보를 전개했다.

미국도 대화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9월12일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차관보를 통해 "2주이내로 북.미대화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했다.

북.미간의 해빙무드 속에서도 양측은 간간이 도발과 제재카드를 내세우며 피말리는 신경전을 주고받았다.

미 재무부가 8월12일 조선광선은행의 미국내 은행계좌와 금융자산을 동결조치하자 북한이 9월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우라늄 농축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마무리 단계이며 추출한 플루토늄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맞섰다.

이로 인해 당초 9월초로 예상됐던 북.미 대화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 와중에 북한 리근 외무성 미국국장과 미국 성 김 대북특사는 10월25일 뉴욕에서 실무접촉을 갖고 북.미대화의 윤곽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11월19일 방한기간 서울에서 북.미대화 일정을 공식 발표했다.

이에 따라 북.미 양국간 공식대화가 오바마 행정부 출범이후 처음으로 8∼10일 성사됐다.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보즈워스 대표는 북한외교의 실세인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과 직접 만나 북핵문제와 평화체제에 대한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

결론은 '절반의 성공'이었다.

'6자회담 재개'라는 획기적 성과물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나 6자회담 재개와 9.19 공동성명의 이행에 대해 공동이해를 도출, 후속대화의 여지를 남겼다.

연초부터 격렬한 충돌음을 내던 양측이 대화의 장에 나오면서 외견상 타협무드가 무르익고 있지만 상황은 여전히 '살얼음판'이라는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북.미대화 직후 불거진 태국의 북한제 무기 압류사건은 북핵사태가 언제든 경색국면으로 돌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경고음으로 들린다.

(서울연합뉴스) 노효동 기자 rh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