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 임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예산안 처리다. 국회가 예산안을 처리하지 않으면 정부가 마비되고 국가가 마비되기 때문이다. 예산안 처리는 국민들에게서 걷은 혈세를 낭비하지 말고 잘 써달라는 국민의 요청을 반영하는 국회의 임무인 만큼 이를 빌미로 파워게임을 하는 건 옳지 않다. 서민들에게 가장 어려운 게 돈을 버는 일이고 가장 쉬운 게 돈을 쓰는 일인데 국민의 혈세를 무책임하게 다루는 건 옳지 않다.

미국 의회는 예산 처리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몇 날 며칠을 밤새 심의하고도 통과가 지연될 때는 소위 임시연장법안 (continuing resolution) 을 통과시켜 정부가 전년도와 똑 같은 예산금액을 우선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 정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다. 의회가 예산안 심의를 제쳐놓고 장외투쟁을 벌인다는 건 미국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미 의원들의 투쟁은 면책특권이 허용되는 의사당 안에서만 토론과 투표에 의해 이뤄진다.

얼마 전 국회의장실을 점검하고 있던 한국 야당 국회의원 몇 명이 헝가리 대통령 방문 일정을 위해 의장실을 비워달라는 국회의장의 요청을 거부하고 버티다가 경비원들에게 끌려나가는 창피한 모습을 보았다. 20여년 전 과격한 학생들이 등록금을 인상했다고 대학 총장실을 점검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 대한민국 의회정치가 거꾸로 간다고 비난을 받는 이유다.

더욱 우스운 일은 야당이 "의회 민주주의를 짓밟은 폭거" 라며 국회의장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국회 본회의를 거부한 것이다. 학생이 등교를 거부하면 퇴학감인 것처럼 국회의원들이 등원을 거부하려면 의원직 사퇴를 각오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지금이라도 야당에 나눠준 상임위원장 자리를 모두 회수해야 한다. 그리고 걸핏하면 장외투쟁을 일삼고 국회 본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의원들을 징계위에 회부해야 한다. 또 의원답지 못한 언사나 폭력을 행사하는 의원은 서슴지 말고 윤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본회의에서 의원직을 박탈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의회 제도다. 아울러 대정부질문 때 국회에 출석한 장관을 마치 죄인 다루 듯 하는 몰상식한 의원들의 행태도 중단돼야 한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며 이를 무시할 경우 의장은 퇴장을 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세종시 같은 말썽 많은 안건은 더 이상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기 전에 일단 논의 유예(moratorium) 를 선언하고 헌법 제71조가 규정하고 있는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게 어떨까 생각한다. 국민투표 (referendum)는 선진국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경제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마당에 제발 정치가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얼마 전 철도노조 파업을 해결하듯 정치판에도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미 통과된 상임위원회의 결정을 불복하는 모습은 보기 안타깝다. 하지만 이는 회의를 주도하는 위원장의 잘못이 더 크다. 적어도 회의를 하기 하루 전 야당의 고위관계자를 만나 서로 토론 시간을 정해 놓아야 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도 중요하다.

전 미 연방하원의원 · 한국경제신문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