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대화 격상..6자회담은 '추인기구화'하려는듯

미국과 북한이 최근 뉴욕 채널과 리 근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의 방미를 계기로 한 일련의 교섭을 통해 북.미대화와 관련한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골자를 추론해보면 양측의 협상대표로 미국측에서 스티븐 보즈워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 북한측에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나오며 협상 장소는 우선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방북을 전제로 첫 회담은 평양에서 하기로 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북한의 요구에 의해 양자대화가 한차례 이상, 즉 '여러차례' 개최될 가능성을 남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북한은 6자회담 복귀 조건으로 양측 고위급 대화를 여러 차례에 걸쳐 할 것을 요구했다고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복수의 북.미관계 소식통을 인용해 8일 전했다.

결국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는 대신 4∼5차례까지를 의미할 수 있는 '여러차례'의 대화를 요구한 것으로 짐작된다.

미국의 요구로는 ▲강석주 제1부상의 참여 ▲2005년 9.19 공동성명 준수 의지 확인(비핵화 의지 확인) ▲6자회담 복귀 가능성 보장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북.미가 이런 입장에 양해함에 따라 '강석주-보즈워스' 회담이 조만간 실현될 것으로 예상된다.

강석주 제1부상은 2002년 10월 '대통령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와 대좌한 이후 7년만에 외교무대 전면에 나서는 셈이다.

2002년 10월의 만남은 그 유명한 'HEU(고농축우라늄) 파문'을 야기하며 2차 핵위기를 촉발시킨 중대 사건이었다.

당시 그는 미국측이 HEU 프로그램에 대해 추궁하자 "핵무기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있다"는 발언을 한 장본인이다.

그는 2003년 8월 시작된 북핵 6자회담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요한 회담에는 반드시 배석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미국이 협상 대표로 강석주 제1부상을 지목한 이유도 '김정일 위원장의 위임' 아래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을 상대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북한과 제대로 된 담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대목은 북한이 '여러 차례'의 협상을 요구했고 어느 정도 수용되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강석주 부상이 미국과 협상에 처음으로 나선 것은 1993년 6월2일부터 11일까지 뉴욕에서 열린 북.미 회담 때였다.

제1단계 고위급회담으로 불린 이 회담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래 무려 40년만에 이뤄진 북.미간 공식회담이었다.

당시 1단계 회담에서 양측은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의 불사용 및 불위협 보장 ▲전면적인 안전조치의 공정한 적용을 포함한 비핵화된 한반도의 평화.안전의 보장과 상대방 주권의 상호존중 및 내정불간섭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 지지 ▲북한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발표 잠정 보류 등이 포함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 북.미 양측은 제네바로 장소를 옮겨 같은해 7월14∼19일 2단계 북.미회담을 개최했다.

여기서 북한 핵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의 일환으로 경수로 도입문제가 제기됐다.

두 차례의 협상 이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이 북한을 방문해 사찰활동을 펼치던 중 핵심시설인 재처리시설 사찰 문제로 북한이 다시 벼랑끝 전술을 펼치는 바람에 상황이 악화됐다.

이후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전격 방북으로 상황이 급반전된 뒤 1994년 7월 제3단계 북.미 회담이 제네바에서 열렸다.

그리고 3단계 2차(8월5∼12일), 3차(9월23∼10월17일) 회의를 거쳐 제네바 합의가 도출된 것이다.

만난 횟수를 종합해 모두 5차례의 회담이 열렸던 90년대의 사례에서 보듯 북한은 미국과의 회담을 한 차례 이상 진행하면서 자신들이 의도하는 협상구도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매우 노련한 협상술을 과시했으며 결국 이를 성사시켰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이런 과거 사례를 돌아보면 북한이 이번에 '여러 차례'의 회담을 요구한 것도 다분히 북.미대화를 실질적인 협상으로 격상시키고 6자회담을 '합의된 내용을 추인하는 장소'로 만들기 위한 전술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북한 외교를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강석주 제1부상이 나오는 만큼 실질적 성과를 올리기 위해 '화려한 전술'이 구사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북한은 북.미대화에서 핵시설과 프로그램의 불능화와 동결은 물론 핵무기의 포기 등 비핵화 문제, 그리고 나아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주요 현안을 놓고 담판을 벌이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핵 현안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9일 "미국 대통령의 특사 자격인 보즈워스와 실질적인 협상을 하려는 북한의 의도가 엿보인다"면서 "북한의 전술이 적중할 경우 북.미 협상의 무게감은 6자회담을 능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이런 의도는 이미 한.미 등 관련국들의 북핵 계산에 포함된 상태로, 관심은 어떤 대응 전술을 구사하느냐다.

현재 한국측은 북.미 대화가 '한차례 이상' 열릴 경우에 대비해 북한의 의도를 차단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을 강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을 방문한 정부 고위당국자가 6일(현지시간) 북.미 대화의 개최 횟수에 대해 "회담이 성과 없이 무한정 가는 것은 아무도 선호하지 않는다"면서 "미국도 이 협의가 무한정 지속돼서는 안 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하지만 북한이 첫번째 열린 미국과의 회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제안을 할 경우 미국도 이를 '무시하지 못하고' 북한과의 협상에 매달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될 경우 북.미 회담의 새로운 의미 부여와 함께 6자회담의 성격 변화, 그리고 미국과 한국, 중국, 일본 등 관련국들 간에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연합뉴스) 이우탁 기자 lwt@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