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는 국회의 인준을 거쳐 임명된다.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하는 공직자를 국회가 검증해 행정부를 견제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국회 총리 인준 여부가 정쟁의 수단이 되면서 종종 파행으로 이어졌다.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여야의 '주도권 싸움'이 문제였다.

6개월간 '총리 서리'를 지낸 김종필 전 총리(JP)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1998년 2월 취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 후보자를 지명했지만 한나라당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총리 인준안은 대통령 취임식 당일까지도 본회의에서 처리되지 못했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은 김종필 후보자를 '총리 서리'로 임명한 채 기형적인 시작을 해야 했다.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 총리 서리 꼬리표는 8월에야 뗐다.

국민의 정부 말기에는 총리 후보자가 두 번 연속 낙마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2002년 한나라당은 당시 장상 총리 후보자의 위장전입 의혹을 집중 문제 삼았다. 7월 본회의에서 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은 출석의원 244명 가운데 100명 찬성에 그쳐 결국 부결됐다.

이어 지명된 장대환 후보자 역시 부동산 투기 의혹 등 도덕성 문제가 제기됐다. 민주당은 인준 찬성을 당론으로 정해 표결에 임했지만 다수당인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표 대결에서 밀렸다. 이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은 급속히 레임덕에 빠져들었다.

2003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도 2월25일 취임식날 고건 총리 인준안을 처리하지 못했다. 한나라당이 총리 인준을 대북송금사건 특검법과 연계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다음날 한나라당은 특검법을 단독 처리한 뒤 임명동의안 표결에 들어갔다. 임명이 늦어지면서 각 부처가 예정됐던 장관 이임식을 연기하는 등 파행이 불가피했다. 원내 기반이 취약했던 노무현 정부는 출범부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총리 인준 문제는 번번이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 이명박 정부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2008년 2월26일 민주당은 한승수 총리 후보자 인준 표결에 불참했다.

내각 후보자들의 재산내역이 공개되면서 부정적인 국민 여론이 형성되자 후보자 교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총리 인준안은 두 장관 후보자가 사퇴한 후 29일 본회의에서야 통과됐다.

김유미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