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6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무려 5일간이나 방북 일정을 연장해 가면서 기다리게 한 뒤에야 비로소 그를 만나는 특유의 '깜짝쇼'를 연출했다.

현 회장이 북측의 초청을 받고 방북할 때는 그간의 관례로 미뤄 당연히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그럼에도 면담이 예상보다 늦춰진 사연은 현 회장의 귀환 이후에나 정확히 알 수 있지만, 김 위원장은 현 회장과 면담을 늦춤으로써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다는 이미지 효과를 노렸을 수 있다.

당초 현 회장의 방북 계획이 알려지고 김 위원장 면담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북한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압박 상황에서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는 관측이 일각에서 제기됐고,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선 정부의 기존 대북정책이 효과를 본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었다.

이를 뒤집으면 북한으로선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할 급한 필요성 때문에 현 회장을 불러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을 되살리는 방안을 모색하려는 것이라는 인상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에 따라 현 회장이 김 위원장 면담을 간청해 만나주는 모양을 취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 회장으로서도 유성진씨의 석방을 이끌어낸 데 이어 무려 5차례나 방북 일정을 연장해가며 끝내 김 위원장 면담을 성사시킴으로써 면담 성과와 무관하게 기업인으로서 집념과 의지, 추진력 등의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일각에선 김 위원장의 현 회장 면담이 늦춰진 것이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 일정과 건강문제 등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지적한다.

그는 지난 12일 함경남도 함흥시 김정숙해군대학을 시찰하고 함흥대극장에서 북한군 장병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한 것으로 보도된 데 이어 13일에는 강원도 원산시 송도원 청년야외극장을 시찰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 이후 김 위원장의 행적에 관한 보도는 없었으나 그가 당시 동해안 일대에서 피서를 하면서 틈틈이 현지지도를 한 것으로 추정돼 그가 평양으로 귀환하는 게 늦어져 현 회장과 면담도 자연히 늦춰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4일 방북한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을 면담한 뒤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현지지도를 하고 다시 평양으로 귀환해 이목이 쏠린 현 회장과 면담을 통해 "동포애의 정"을 나타냄으로써 클린턴 전 대통령 면담 효과를 이어간 것이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이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현 회장 일행을 초청해놓고 면담을 미룬 것은 그의 건강문제였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장용석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클린턴 전 대통령과 같은 거물이야 사실상 정부 특사급이니 사전에 면담 일정이 잡혔겠지만 현 회장은 면담 일정을 확정해서 간 것은 아니었을 것이므로 당초 예정보다 면담이 미뤄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늦춰진 것은 김 위원장의 건강과 일정 같은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봤다.

한 대북 소식통도 "김정일 위원장이 대내외적으로 건강하고 정상적인 통치를 과시하고 있지만 여전히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으로 안다"며 "외부적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금강산 및 개성관광 등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현안들에 대한 현 회장과 북한측 실무책임자들간 조율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현 회장은 지난 13일 대남담당 총책으로 이번에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한 것으로 확인된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을 만나고 3일이나 지나서야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었다.

현정은-김양건 회동에서도 이견이 남아있어 김 위원장 면담이 차일피일 미뤄졌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장용석 연구실장은 "김양건 부장이 현정은 회장과 이야기를 하고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 자리에서 현안에 대한 결심을 받아내는 형식으로 진행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의 8.15경축사를 지켜본 뒤 향후 남북관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면담의 대화 수위를 조절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느냐는 지적도 있다.

한 북한 전문가는 "김 위원장은 현 회장과 면담을 미룸으로써 남한과 국제사회의 이목을 평양으로 로 집중시켰고 막판 면담 '시혜'를 통해 극적 효과를 최대화했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최선영 기자 chs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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