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창 정치부장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지난주 한편의 감동드라마를 미국민에 선사했다.전격적인 방북을 통해 141일간 평양에 억류돼온 여기자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북한의 핵실험 이후 북·미간 조성된 최악의 경색국면에서 해결사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사실 여기자 억류사태는 미국 정부로선 난감한 사안이었다.북핵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기엔 부담이 적지않았다.자칫 향후 북핵협상에 악재가 될수도 있다는 점을 미국 정부로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클린턴은 이런 정부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 준 것이다.

클린턴은 방북비용을 스스로 조달했다.대통령 재직때 친분을 쌓은 기업인들의 자발적 도움으로 항공기와 소요비용 일체를 마련했다.폭넓은 인맥으로 방북팀도 꾸렸다.정부에는 단 한번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특히 여기자 사태를 푸는 과정에서 클린턴은 전직대통령의 처신에 대한 모델을 보여줬다.평양에서 시종 굳은 표정을 유지,북한의 과대한 정치적 의미부여를 경계하는 미국 정부를 편안하게 해줬다.미국 도착후에는 스포트라이트를 여기자들에게 넘기고 그 흔한 도착 회견조차 생략했다.‘역시 클린턴’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유다.

미국이 전직 대통령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사례는 또 있다.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핵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 대북특사로 평양을 방문,김일성과 극적인 타협점을 찾아 대결국면을 돌려놨다.남북정상회담 이라는 선물까지 챙겼다.카터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보다 퇴임후에 훨씬 빛을 발한 대통령이란 평가다.

전직 대통령은 국가 원수를 지낸 상징성있는 최고의 민간인이다.현직을 떠났어도 위상은 여전하다.미국 정부가 국가적 이해가 걸린 민감한 사안에 전직대통령을 활용하는 이유다.현 정부의 부담을 피하면서 문제를 푸는 최적의 카드지만 국가이익 앞에선 하나가 되는 정치풍토가 없었다면 어려운 얘기다.

같은 대통령제를 택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암담하다.퇴임후 전직 대통령들이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는 얘기는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다.국가와 국민을 위한 역할은 커녕 국민의 눈살을 찌프리게 한 경우가 적지않았다.역대 대통령중 임기말 불거진 가족이나 측근 비리로 불행한 퇴임을 맞거나 퇴임후 임기중 비리가 드러나 구속되거나 검찰수사를 받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정권이양이 항상 매끄럽지 못했다.여야의 정권교체는 물론 같은 정파내에서의 교체시에도 전 현직 대통령의 관계는 늘 껄끄러웠다.전 대통령은 승계의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정권이 바낄때마다 정치보복 얘기가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여기에 전직대통령들이 지나친 정파색을 띄면서 국가의 원로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하기 보다는 정파의 ‘막후수장’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전 현직 대통령이 한 자리에 모여 환하게 웃는 모습 조차 보기 어려운 게 우리 현주소다.이런 소통부재와 갈등의 정치가 계속되는 한 전직 대통령의 역할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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