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의회에서 법안 표결은 목소리(voice vote)로 하는 게 우선이다. '가부(可否)'를 묻는 의장의 질문에 의원들이 일제히 "Aye(찬성)" 또는 "No(반대)"를 외치면 의장이 귀로 듣고 어느 쪽이 더 많은지 판단해 결과를 발표한다. 반대 측 의원들이 의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의장이 듣기에도 목소리 투표가 명확하지 않을 때만 비로소 '기록 표결(recorded vote)'을 한다.

이런 절차는 국회법 같은 '성문법'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오랜 기간 그렇게 하다보니까 굳어진 '관례'다. 매우 원시적인 데다 법적 구속력도 없지만 영국 의회에서 표결을 하다가 회의장이 난장판이 됐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우리 국회는 정보기술(IT)에 힘입어 버튼만 누르면 실시간으로 찬성표와 반대표가 전광판에 집계되는 최첨단 전자투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23일 국회에선 전날 미디어법 표결 과정에서 이 버튼을 "남이 대신 눌렀다(여당의 대리투표 의혹)"느니 "정상적으로 누르려는 것을 몸으로 막았다(야당의 투표 방해 의혹)"느니 하는 공방에 휩싸였다. 수준 이하의 정치인들에겐 최첨단 시스템이 그야말로 '돼지목에 진주 목걸이'인 셈이다.

민주당은 전병헌 문방위 간사 등으로 채증반을 구성해 대리투표를 입증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한나라당 측은 오히려 "민주당이 한나라당 의원의 자리에서 반대표를 찍어서 문제가 됐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든 둘 중 하나는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꼼수'를 동원했다는 얘기다.

일각에선 재발 방지를 위해 전자투표기에 비밀번호를 입력토록 보완하자는 얘기도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우리 국회법에는 각종 '꼼수'를 막기 위한 조항들이 적지 않다. 그만큼 비상식이 판을 치는 게 우리 국회다.

지난 17일(제헌절) 국회의사당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의회민주주의를 체험 학습토록 한다는 취지로 '어린이 모의국회'가 열렸다.

어린이들은 질서정연한 표결 끝에 '어린이 법원을 만들자(수원 화양초교)'는 제안을 1등으로 채택했다. 이들에게 의회 민주주의를 배워야 할 사람들은 오히려 여야 정치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기현 정치부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