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국세청 살리는 길

이명박 대통령이 세무행정 경험이 없는 '세치(稅癡)' 백용호 전 공정거래위원장을 국세청장으로 내정한 것은 연에 휘둘리지 말고 국세청을 개혁하라는 뜻일 게다. 전 청장들의 잇단 구속과 불명예퇴진으로 실추된 국세청의 명예를 외부인사의 신선한 시각으로 되살려내라는 소명이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다양한 개혁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백 청장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내부에 민간 국세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대기업 세무조사는 정기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고위 · 간부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외부에 감독위원회를 설치하거나 세무조사과정의 비리를 없애기 위해 지방청을 없애는 방안이 제시되기도 했었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 모르지만 전직 국세청 고위 간부의 증언을 들어보면 해답은 그런 방안들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젊은 시절 지방 세무서장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어느날 세금을 더 걷으라는 본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머리를 싸매다가 한동안 세무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기업을 골라냈습니다. 보통 3~5년에 한 번씩 조사를 하는데 그 기업은 10년 이상 조사를 받지 않았더군요. 실무자에게 조사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런데 잘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곧바로 힘있는 기관들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서장, 의지는 알겠는데.그래도 될까. ' 그런 투의 전화를 몇 통 받으니 황당하다 싶더군요. 사정을 알아봤죠.그 기업은 권력자 최측근의 동생이 운영하던 기업이었습니다. 제대로 했으면 평소 금액의 10배 이상을 추징했을 텐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문제의 기업이 조사망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권력층의 비호였고 일선 세무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지내왔던 것이다.

권력층이 정상적인 세무조사 권한을 제한하면 그 안에서 타협이 이뤄지고 타협의 테이블 밑에서 부패와 비리가 싹트게 마련이다. 세무행정을 감시 감독할 위원회를 국세청 내부에 두든 외부에 두든 권력층의 잘못된 의지가 작용하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대통령이 정치적 목적으로 국세청을 활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밝히고, 측근이라는 사람들의 호가호위를 발본색원하지 않는 한 시스템 개혁은 용두사미로 끝날 수밖에 없다.

거꾸로 국세청장 스스로 세무조사권한을 권력층에 상납하거나 자리를 지키는 수단으로 활용하면 또다른 부정이 생기게 된다. 새 정부가 집권준비를 하던 시절 인수위원회의 한 멤버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국세청 고위 관계자가 대통령 최측근의 세무관련 자료를 무기로 자리 협상을 해왔다는 것이다. 집권층에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약점을 쥐고 개인의 영달을 추구했다는 얘기다.

사실 일선 세무서의 소소한 비리는 예전에 비하면 많이 개선됐다. 다른 인허가 행정의 비리보다 심하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국세청 개혁의 목소리가 높은 것은 모세혈관에서 일어나는 작은 출혈 때문이 아니다. 한상률 전군표 이주성 등 전 청장들이 비리와 부패 혐의로 퇴진하는 등 대동맥이 터지는 '대출혈'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무조사를 무기로 써온 권력층과 국세청 고위급들의 잘못된 관행,추한 문화가 빚어낸 합작품이다. 국세청 개혁의 본질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고광철 부국장 겸 경제부장 gw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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