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1일 강원도 원주시 반곡동 주민센터.마당 한켠에 놓인 대형 스피커에서 흥겨운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평상복을 걸쳐입은 100여명의 '시골 아저씨'들은 쉴 새 없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이날 행사는 원주혁신도시 건설에 따라 토지를 수용당한 주민들을 위해 원주시와 토지공사 등이 마련한 위로 잔치.원주혁신도시는 2007년 7월 토지보상에 착수한 지 2년 만에 97.8%의 땅을 수용,터파기 공사가 한창이다. 전창식 원주혁신도시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토지 보상도 끝났고 공사도 계획대로 진행되는 마당에 이제와서 공기업이 안 내려올 수 있겠느냐"며 "만에 하나 당초 계획이 변경된다면 원주시민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2012년 원주혁신도시로 이전하는 한국관광공사 임직원들의 사기는 요즘 말이 아니다. 최근 국토해양부로부터 "본사 인력 431명 중 400명은 원주로 옮겨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관광공사가 요청한 서울 잔류 인력 수는 94명.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의 75%가 서울을 찾는다는 점,인천공항과 멀어지면 외국인과의 교류에 차질이 생긴다는 점 등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관광공사 관계자는 "반드시 서울에서 일해야 하는 부서가 많아 향후 편법적으로 서울 근무 인력이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대로 간다면 실력있는 인재들과 맞벌이 부부를 중심으로 '이직 도미노'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방은 혹시라도 안 올까봐 안달이고,공기업은 어떻게하면 안 갈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그리고 중간에 서서 지켜만 보는 정부.혁신도시를 둘러싼 요즘 풍경이다.


#"지방 전체를 상대로 싸울거냐"

혁신도시를 건설 중인 10개 시 · 도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은 만큼 청와대가 나서 빨리 사업을 진척시켜달라"는 것이다. 토지 보상과 기반공사가 착착 진행되고 있는 만큼 예정대로 공기업들이 입주하도록 재촉해달라는 것이다.

이재완 한국토지공사 강원혁신도시건설단장은 "혁신도시의 기본 구상은 수도권에 집중된 공기업을 지방으로 분산한 뒤 이들 기업을 거점으로 자립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그런 만큼 혁신도시의 주인공인 공기업 이전이 빨리 확정돼야 병원,연구소,기업이 따라 들어오고 아파트 건설도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공기업들과 정부는 미적지근하다. 혁신도시로의 이전 대상 공공기관 124곳 가운데 49개 기관은 마감시한(2009년 6월)이 지났는 데도 여전히 이전 계획을 확정짓지 못했다. 이전 계획이 확정된 공공기관 중에도 주택공사 토지공사 등 통폐합 절차가 진행 중인 곳들은 사실상 이전 업무를 접었다. 그 밖에도 상당수는 부지 매입 및 청사 설계 등 후속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가스공사 등은 2007년 말에 이전 승인을 받은 만큼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정부는 닦달대지 않는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증권예탁결제원은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직원의 45%를 서울에 남기는 데 성공했다. 노무현 정부 때였으면 상상도 못할 '반쪽 이전'인 셈이다.

이러다보니 해당 지역민들 사이에선 "진짜 혁신도시가 만들어지겠느냐" "청와대의 암묵적인 지시로 공기업이 안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다. 나주혁신도시를 공동 추진하고 있는 박광태 광주광역시장과 박준영 전남 도지사가 지난 5월 국토부 장관에게 "지방 이전을 승인받은 기관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이전 절차 진행을 지연하고 있다. 정부가 직접 나서달라"고 촉구한 것은 이런 불안감을 보여준다.

한 지역 공무원은 "세종시는 충청도만의 문제지만 혁신도시는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시 · 도가 걸린 사안"이라며 "혁신도시 건설에 차질이 생길 경우 지방 사람들은 청와대가 모든 지방을 상대로 선전포고한 것으로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버티기' 들어간 공기업

원주혁신도시는 그나마 10개 혁신도시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지역이다. 서울과 가까운 데다 30만명이 거주하는 원주시를 배후에 두고 있어서다. 백화점만 없을 뿐 대형마트,영화관 등 문화시설과 생활편의시설도 갖춰져 있다. 출퇴근은 어렵지만 마음 먹으면 언제든 서울로 갈 수도 있다.

이 정도 여건이면 '북적대는 서울을 떠나 새로운 터전에서 시작해보자'는 마음이 들 법도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일단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역으로,그것도 '타의'에 의해 가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불만이다. 맞벌이 부부는 어느 한쪽이 직장을 포기하든가,아니면 '기러기' 생활을 해야 한다. 초 · 중 · 고에 다니는 자녀를 둔 임직원도 기러기 생활을 강요받을 수 있다. 동창회,동호회 등 그동안 서울에서 쌓아온 네트워크도 상당 부분 포기해야 한다.

이러다보니 '21세기판 유배'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온다. 한 공기업 직원은 "그래도 우리 회사는 서울과 가까운 원주로 간다는 이유만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며 "나주로 가는 공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는 '이전이 가시화되면 연봉이 줄더라도 서울에 남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기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털어놓았다.

지방에 내려가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점도 공기업들이 '버티기'에 나서는 핵심 이유 가운데 하나다. 최근 만난 한 공기업 사장은 "지난 정권 때 예외를 주지 않은 탓에 전 부서가 내려가기로 했지만,업무 특성상 마케팅 기획 영업 해외업무 등 상당수 부서는 서울에 둘 수밖에 없다"며 "이제 공기업도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손발 묶어놓고 싸우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다른 공기업 사장은 "지방으로 가면 헬리콥터를 몇 대 구입해야 할 것 같다. 비즈니스가 전부 서울에서 이뤄지는데 어쩌겠느냐.이런 낭비와 비효율은 고스란히 국민 부담으로 전가될 것"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정부가 '확실한 사인'을 보내지 않는 것도 공기업들이 뜸을 들이는 또 다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가 혁신도시 사업에 미온적이란 사실을 아는 만큼 '눈치 없이' 먼저 내려가겠다고 나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안 내려가겠다"고 선언할 수도 없는 만큼 '내려가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어정쩡한 모습이 오히려 정답이 됐다는 게 공기업들의 설명이다. 한 공기업 임원은 "정부가 단호하게 이전을 지시하지 않는 한 스스로 움직일 기관은 몇 개 안 될 것"이라며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공기업들 사이에는 '최대한 버티면 구제될지 모른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원주=오상헌/나주=장규호 · 박동휘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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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신도시는

혁신도시는 공공기관 이전을 촉매로 활용해 해당 지역사회에 산업혁신을 유도하려는 목적에서 추진됐다. 노무현 정부는 2003년 6월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공공기관 지방 이전 방침을 발표했다. 다음 해인 2004년 4월 국가균형발전특별법을 제정,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어 2005년 5월엔 정부와 해당 시 · 도지사 간 기본협약을 체결하고 6월에 공공기관 지방이전계획을 확정,발표했다. 그해 12월엔 10개 혁신도시 입지 선정을 끝냈다. 2006년 2월 혁신도시건설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에 들어갔다. 혁신도시는 부산(영도 · 해운대 · 남구,동북아해양수도),대구(지식창조 브레인시티),광주 · 전남(나주,그린에너지피아),울산(경관중심 그린에너지폴리스),강원(원주,비타민시티),충북(진천 · 음성,교육 · 문화이노밸리),경북(김천,IT · BT드림밸리),전북(전주 · 완주,농업 · 생명허브),경남(진주,산업자원거점도시),제주(국제교류 · 연수폴리스) 등 10개로 조성된다.

10개 혁신도시의 총면적은 4488만㎡.여의도 면적(848만㎡)의 5.3배다. 총 사업비는 10조8125억원(용지비 4조8616억원,공사비 5조9509억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