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6일 경남 김해에서 과수원을 하는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진영 대창초등학교(1959년)와 진영중학교(1963년),부산상업고등학교(1966년)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는 입학금이 부족할 정도로 가난했다. 어머니는 "책값만 먼저 내고 여름 복숭아 농사 지으면 입학금을 내겠다"고 사정했다. 그러나 학교 측은 거부했다. 울며 매달리는 어머니 뒤에서 노 전 대통령은 "이런 학교 안 다녀도 좋소"라며 입학원서를 찢었다. 학교의 한 관계자는 "저런 놈 공부시키면 안 된다"고 화를 냈다. 결국 큰 형의 항의를 학교 측이 받아들여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큰 형의 권유로 3년 장학금을 받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어망회사에 다니다가 그만 두고 고시공부에 나섰다. 1968년 3월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당시 강원도 원주에 있는 육군 1군사령부에서 행정병으로 복무했다.

만기 제대 후 1971년 고향에 돌아온 노 전 대통령은 고졸 출신에게 사법고시 응시 자격을 주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했지만 두 차례 연속 낙방했다. 1973년 부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네 처녀인 부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그 뒤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고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합격했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노 전 대통령은 1977년 대전지방법원에서 판사로 부임했지만 7개월 만에 그만두고 1978년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그는 주로 등기업무,조세 · 회계 사건 등을 수임해 돈을 벌었다. 1981년 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 변신했다. 그러다 1982년 대학생 시절 시위 경력 때문에 판 · 검사 발령을 받지 못한 문재인 변호사를 만나면서 '현실정치'에 눈을 떴다.

이후 학생과 노동자 등이 연루된 각종 인권사건 변론을 맡았고 1987년에는 대우조선 노동자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에 연루됐다가 제3자 개입 혐의로 검찰에 구속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8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재야인사 영입 사례로 발탁돼 13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서 당선,정치에 입문했다.



초선의원 시절인 1989년 전두환 전 대통령 비리와 관련해 열린 국회 5공 청문회에서 그는 '전두환 살인마'를 외치며 전 전 대통령을 향해 의원 명패를 집어 던지고 날카로운 질문 세례를 퍼부으며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민정당 통일민주당 공화당의 3당 합당 때는 '역사적 반역'이라며 당시 김영삼 총재를 따르지 않고 당에 잔류했다가 '삼수'의 시련을 겪었다. 1992년 총선 패패,1995년 부산시장 낙선,1996년 서울 종로 패배 등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해 김대중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이어 1998년 7월 서울 종로 보선에서 6년 만에 원내 재입성에 성공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종로를 마다하고 부산에 자원 등판했다가 다시 쓴 맛을 봤다. 이 과정에서 국회의원이라는 기득권과 안락한 지역구를 떠나 대의를 좇는 그의 모습에 '바보 노무현'이라는 애칭이 붙었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일등공신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탄생했다.

그는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에 발탁돼 정치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대권 도전의 중요한 발판이기도 했다. 2001년 3월 장관직을 떠난 그는 본격적인 대선 준비에 나섰다. 변변한 조직도 없었지만 국민참여 경선에 힘입어 당시 '대세'였던 이인제 후보를 큰 차이로 누르고 새천년민주당의 대선 후보가 됐다. 몇 차례 말실수로 '불안하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지지도 하락을 경험했지만 월드컵 축구 4강 열기에 힘입어 상승세를 탔던 '국민통합21'의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제치고 대권을 거머쥐었다.

제16대 대통령 당선 후에도 그의 정치적 굴곡은 계속됐다. 대통령 재임 시절 정제되지 않은 발언 때문에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검찰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었다. 특히 취임한 지 보름도 채 안돼 평검사들과 '맞짱 토론'을 벌여 퇴임 후까지도 검찰과 악연이 지속됐다.

취임 1년 뒤에는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으로 탄핵 소추돼 2개월간 직무정지를 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탄핵에서 돌아온 뒤에도 파격적 행보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야당은 물론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불행한 대통령이었다. 한때 그의 지지율은 10%대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해서는 고향 김해에 머물며 나름의 활동 영역을 찾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해 말 오랜 후원자였던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정계 로비가 공개되면서 자신이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웠던 '도덕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가족들도 비리 의혹에 휘말려 검찰 수사를 받았다. 결국 지난해 12월 형 건평씨가 세종증권 매각 로비 사건으로 구속 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 자신도 재임 시절 박 회장으로부터 60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에 소환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세 번째였다. 특히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건호씨,딸 정연씨 등 일가족이 박 회장에게서 금품을 받은 혐의로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겼다.

강동균/이심기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