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데드라인에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무기로 쟁점 법안의 강행 처리를 밀어붙인 한나라당에 민주당이 사실상 '백기투항'한 것이다.

1,2일 국회 상황은 김형오 국회의장의 의중에 따라 하루에도 몇 번씩 여야의 희비가 엇갈린 시간의 연속이었다. 직권상정 권한을 가진 김 의장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협상의 무게중심이 요동쳤다.

처음에는 민주당이 웃었다. 1일 오후 3시부터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표 회담이 벽에 부딪치자 김 의장은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를 의장실로 불렀다. 김 의장은 이 자리에서 민주당 안에 가까운 중재안을 제시했다. 미디어 관련 법에서 상대적으로 쟁점이 적은 2개 법을 4월 국회에서 처리하고 신방 겸영(신문과 방송 겸영)과 관련 있는 신문법 방송법 등은 6월까지 논의하자는 것으로 처리 시한은 빠져 있었다. 사실상 민주당 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경제 관련 법안에서도 한국투자공사설립법과 은행법은 처리하되 산업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의 처리는 4월 임시국회로 미뤘다. 2월 임시국회에서 금산 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 분리)와 산은 민영화 관련 법의 일부만 처리하는 애매한 중재였다.

당장 한나라당은 발끈했다. 홍 원내대표는 "중재안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고 합의안에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합의안 추인을 위해 2일 새벽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도 "도대체 얻은 게 뭐냐" "미디어법의 처리 시한을 못박지 못하면 언제까지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느냐"는 의원들의 성토가 쏟아졌다. 이에 따라 합의문을 최종 추인할 예정이던 2일 오전 여야 회담은 한나라당의 거부로 무산됐다.

2일 낮 12시부터는 김 의장의 무게추가 다시 한나라당으로 급격히 기운다. 침묵을 지키던 박근혜 전 대표까지 "미디어법은 민주당이 양보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한나라당의 반발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김 의장은 "여야 협상이 끝내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직권상정 수순을 밟겠다"며 자신이 제시했던 중재안을 철회했다. 한나라당의 요구를 중심으로 미디어 관련 법과 금산분리 완화,산은 민영화,주택공사와 토지공사 관련 법 등 주요 쟁점 법안을 직권상정 대상에 넣고 심사 기일을 지정한 것이다.

이번에는 민주당이 당황했다. 불과 12시간 만에 김 의장이 스스로의 중재안을 뒤집으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던 데다 1월 '입법전쟁' 때와는 달리 실력 저지를 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 원내대표 등은 "한나라당이 중재안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김 의장이 쟁점 법안을 직권상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민주당은 본회의 시작 1시간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양보하면서 매달리다시피 추가 협상을 요구했으며 이 과정에서 정세균 대표가 15분간 오지 않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를 회담장에 먼저 나와 기다리는 '굴욕'도 연출됐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