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후 2시 서울 선릉역 인근의 한 고용지원센터. 실업급여 신청을 하려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중년의 화이트칼라 두 명이 나타났다.

지원센터 창구 앞에서 길게 줄을 서 한참을 기다린 두 신사는 자기 차례가 되자 실업급여 수급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상세히 물었다.

창구의 직원은 먼저 전산시스템을 활용해 실업보험 가입 여부를 확인하고 급여수급이 가능한지를 알려주려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주민등록번호를 대는 대신에 실업자들이 실업 후에 무엇부터 해야하는지,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고 훗날의 취업준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런 행정기관에서 이런 것들을 잘 도와주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교육실에서 다른 50여명의 실업급여 신청자들과 함께 서류작성 방법과 구직 프로그램 이용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이 두 사람은 최근 승진하거나 자리를 옮긴 기획재정부 예산담당 고위간부. 류성걸 예산실장과 김규옥 사회예산심의관이었다.

류 실장은 올해 280조원이 넘는 국가예산의 쓰임새를 총괄하는 고위 관료, 김 심의관 역시 올해 정부가 추경예산 편성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일자리 창출과 민생안정 분야를 관장하는 국장이다.

두 사람이 고용지원센터를 찾은 것은 최근의 고용 현실이 어느 정도인지, 실업자 입장에서 진정으로 정부가 해줘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체감하기 위해서였다.

류 실장은 26일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는 추경예산의 효율성을 어떻게 담보할 것인지를 묻는 기자에게 이 고용센터 방문 사실을 털어놨다.

돈을 푸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일이지만 행여 이 돈이 효율적으로 쓰이지 못하면 국가 경제의 앞날은 매우 어둡게 된다.

국가가 세금을 거둬 푸는 돈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 '눈먼 돈'이 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예산을 짜고 집행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막기 위해 바쁜 틈을 쪼개 실업자를 가장하고 현장을 찾아간 것이다.

류 실장은 "일자리 관련 예산이 진정 국민의 어려움을 덜고, 실의에 빠진 이들이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잠시라도 그 사람들 입장에 서봐야 할 것 같았다"면서 "직원들이 주는 자료만 보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창구직원 한명이 하루에 100명 이상 상담하면서도 친절하게 대해줘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토로했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줄을 서거나 교육을 받으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말을 붙였다.

"마음이 답답하다", "허망하다", "가족들 보기가 미안하다" 등의 답이 돌아왔다.

'조' 단위에도 무감각해진 예산실 고위공무원의 마음이 수만원, 수십만원도 소중하게 써야 한다는 새삼스러운 '초심'으로 되돌아온 순간이었다.

(서울연합뉴스) 주종국 기자 satw@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