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합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스타앵커서 장관ㆍ黨의장…이젠 大權 넘본다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은 방송 앵커에서 출발해 여권의 대표적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한 이후 대중적 인기를 자양분으로 삼아 두 차례 열린우리당 의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내는 등 '성공시대'를 구가해왔다.

하지만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노인 폄하' 발언으로 비례대표 후보직과 의장직까지 포기한 데 이어 지난해 5ㆍ31 지방선거 참패로 또 다시 당 의장직에서 불명예 퇴진하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그는 열린우리당 탈당과 대통합신당 창당 과정에서 비노 진영을 대표해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워 친노(親盧) 세력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최후의 승자가 됐다.

◆학창시절=정 후보는 6ㆍ25 전쟁 휴전일인 1953년 7월27일 전북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에서 태어났다.
[대통합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스타앵커서 장관ㆍ黨의장…이젠 大權 넘본다

9형제의 다섯 째로 태어났지만 네 명의 형이 전쟁 중에 모두 사망하는 바람에 졸지에 장남이 됐다.

그는 부모가 난리통에 다시 가진 첫 아이인 셈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전주 친척집에 기거하며 공부하던 중 전주고 2학년 때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병을 얻은 상태에서 치른 대학입시에서 낙방의 쓴맛을 봤다.

재수 끝에 10월 유신이 선포된 197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들어간 그는 유신반대 투쟁으로 두 차례 구속되고,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강제징집을 당했다.

그가 수감되자 어머니는 순창에서 동생 3명을 데리고 상경해 한양대 뒤편 성동구 사근동, 옛 77번 버스 종점이 있던 언덕배기 판자촌 셋방에서 재봉틀로 생계를 이어갔다.

정 후보도 군 복무를 마친 뒤 어머니를 도왔다.

어머니가 만든 옷들을 용달차에 싣고 청계천 평화시장에 내다팔았다.

저녁이면 수금하고 그 돈으로 다시 원단이며 실 단추 액세서리를 사서 사근동 산비탈을 올랐다.

직접 봉제 작업도 했다.

초크로 원단에 본을 그리고 재단을 하면 어머니가 재봉을 했다.

그러면 다시 그가 '오버로크'(재단 후 실이 풀리지 않게 하는 마무리 작업)를 치고 실밥을 뜯었다.

"학교는 그야말로 부업으로 다녔다"고 할 정도였다.

[대통합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스타앵커서 장관ㆍ黨의장…이젠 大權 넘본다
◆기자생활=1978년 가을, 스물다섯 살 복학생 정동영은 한국일보와 문화방송(MBC) 기자 시험에 응시했다.

집안이 어려워 옷가게를 열어 돈을 벌 궁리를 하기도 했지만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 기자가 되기로 한 것.그는 "대학 동아리 선배 중 친하게 지낸 두 사람이 동아일보 기자가 됐는데, 기자실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모습이 참 멋져보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일보 시험엔 떨어지고 MBC는 필기시험을 통과한 후 면접을 보게 됐다.

당시 면접관으로 들어온 MBC 사장은 그에게 현재의 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눈 가리고 아웅'식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사장이 내려다보고 있는 입사지원서엔 유신반대 시위에 가담했다가 구속된 전력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 후보는 "유신은 망할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강압적인 철권통치를 포기하고 민주화로 나가야…"라고 대답했지만 면접관은 그의 말허리를 끊고 나가보라고 했다.

면접시험 도중에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수업을 듣기 위해 터벅터벅 학교로 향했다.

당연히 불합격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최종 합격자 10명 가운데 끼어 18년간의 방송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입사 첫해 MBC 사보에 '한국의 크롱카이트(미국의 유명 앵커)가 되고 싶다'고 적어냈던 그는 그러나 입사 2년 만에 터진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현장에 내려갔지만 보고 들은 대로 보도할 수 없었다.

이 때 그가 취재했던 리포트는 지난 5월 우연히 발견돼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그는 방송기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아 사회부 정치부를 거쳐 LA특파원과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냈다.

LA특파원 시절에는 걸프전과 독일 통일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기자생활 3년째 정 후보는 부인 민혜경씨와 결혼했다.

복학한 뒤 고향 친구로부터 숙명여대 3학년이던 민씨를 소개받아 '납치'한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민씨 부모는 "아무 일 없었다고 하지만 정동영이 가만있을 녀석이 아니다"면서 결국 결혼을 허락했다.

◆정치입문=1995년 6월29일 발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10시간 현장 생방송을 통해 시청자에게 뛰어난 기자로 각인됐지만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점을 접하고 괴로워했다.

그는 "우리가 허겁지겁 쌓아온 정치 경제 사회 구조도 어느날 갑자기 형체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 한 번도 흐르지 않고 고여 썩은 낡은 리더십을 털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의 현실 참여는 199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입문 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실현됐다.

당시 대중에 얼굴이 많이 알려진 점이 새로운 인물을 찾고 있었던 김 전 대통령의 눈에 든 것이다.

정치인으로서 출발은 화려했다.

15, 16대 총선에서 전북 덕진에 출마해 연거푸 전국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국회에 입성한 뒤에는 곧바로 새정치국민회의 당 대변인을 맡아 수평적 정권 교체에 일조했고, 1998년 서울시장 선거대책본부 기획단장을 맡아 고건 시장 당선에 공을 세우는 등 조기에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정풍운동… 시련=2000년 최연소 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돼 초ㆍ재선 그룹 리더로 부상한 그는 첫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이른바 '정풍운동'이다.

그해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김 전 대통령 면전에서 권력 2인자였던 권노갑 최고위원의 2선 퇴진을 촉구했다.

당시 정풍운동은 동교동계의 강한 반발을 샀지만 초ㆍ재선 의원들이 그를 지지하면서 권 최고위원은 물러났고, 그는 차세대 주자로 급부상하게 됐다.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한 정 후보는 다른 후보들이 모두 중도하차할 때 '국민경선 지킴이'를 자처하며 끝까지 경선을 완주했다.

이어 노무현 후보 선거대책 공동위원장과 국민참여운동본부 본부장을 맡아 정권 재창출의 '일등공신'이 됐다.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그는 초대 당 의장으로 선출돼 이듬해 17대 총선에서 47석의 초미니 여당을 152석의 '거대 여당'으로 이끌었다.

정작 자신은 '노인 폄하' 발언으로 비례대표 후보직을 내놓아 국회의원 배지를 달지 못했으나 참여정부 실세로 자리잡았다.

2004년 7월에는 '대권수업' 차원에서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 2005년 6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경색된 남북관계의 탈출구를 마련하는 등 남북문제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행정부에서 18개월간 대권수업을 받은 뒤 여의도에 돌아왔으나 기다린 것은 혹독한 시련뿐이었다.

지난해 2월 당 의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해 진두지휘한 5ㆍ31 지방선거에서 대패하며 의장직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20%를 넘나들던 지지율은 3%에도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여권에서 대선 후보 1순위로 꼽히던 그의 정치적 시련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2개월간의 독일 체류와 민심대탐방, 평화대장정 등을 거치며 권토중래를 꾀하던 정 후보는 6월18일 범여권 정계개편 와중에 열린우리당을 전격 탈당했다.

탈당에 앞서 이미 4월 노 대통령과의 독대에서 정치적 결별을 고했던 그는 비노(非盧) 진영의 선봉에 서며 두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