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4일 서명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은 남북관계 전반에 대한 방대하고도 구체적인 합의를 담고 있다.

마지막 냉전지대였던 한반도를 평화지대로 전환하기 위한 평화정착 방안과 함께 남북이 공동번영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구체적 경제협력사업들, 남북 간 불신의 벽을 허물고 통일로 한 걸음 다가서기 위한 조치 등이 총망라됐다는 평가다.

특히 2000년 정상회담 이후 경협 부문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진전이 더뎠던 정치.군사 부문에서도 적잖은 합의가 이뤄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 평화정착 = 이번 정상회담은 한반도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체제로 나아가기 위한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전망이다.

10.4선언 4항에는 종전선언을 위해 미국과 중국 등 관련국을 포함한 3자 혹은 4자 정상이 모이는 방안을 담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물론 미국도 종전선언을 위한 정상회담에 적극성을 보여왔지만 북측의 의지를 확인했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갖고 있다.

노 대통령은 귀환보고회에서 "김 위원장은..(중략)..한미간에 논의한 바 있는 종전선언 방안에 대해서 구체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그리고 이것을 성사시켜도록 남측이 노력을 해보라, 이런 주문을 했다"고 말했다.

선언에 시기가 적시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긍정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북핵 6자회담 분위기를 감안하면 3∼4국 정상이 핵불능화가 마무리되는 연말께 회동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종전선언 문제를 실질 당사자인 남북 정상이 만나 주도적으로 논의했다는 점에서 향후 평화체제 전환에 있어서도 남북이 주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가다.

양 정상은 아울러 6자회담에서 도출된 9.19공동성명과 2.13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다.

남북 정상차원에서 6자회담의 성실한 이행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남북관계와 6자회담이 선순환적 구조를 갖춘다는 정부의 전략도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

◇ 군사적 긴장완화 =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경협 분야에 비해 발전이 크게 더뎠던 군사분야의 협력을 위한 기초가 마련됐다는 평가다.

남북은 산적한 군사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11월 중 평양에서 국방장관회담을 열기로 했다.

2000년 9월 제주도에서 1차 국방장관회담이 열린 지 7년 여 만으로, 북측은 그동안 국방장관회담 개최에 소극적이었다.

국방장관회담 의제는 ▲서해상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한 공동어로수역 및 평화수역 조성 방안 ▲각종 협력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제 등으로 선언에 적시돼 있다.

이 두가지는 그간 남북장성급회담 등에서 논의돼 왔지만 접점을 찾지 못하던 사안으로, 공동어로수역은 남북 간 첨예한 긴장의 현장이었던 서해 북방한계선(NLL) 주변에 공동어로를 설정해 남북이 공동이용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또 군사적 보장조치가 이뤄지지 않아 이행되지 못한 ▲임진강.한강하구 공동이용 ▲임진강 수해방지사업 ▲경의선.동해선 철도개통 등 경협사업들도 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돌파구가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국방장관회담에서는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명시된 직통전화 설치, 군사훈련 상호통보.참관 등에 대한 논의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남북은 해주지역과 주변해역을 포괄하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 해주항 활용 등을 추진해 나가기로 했는데, 이는 평화와 번영을 결합한 새로운 평화경제 사업이라고 정부는 자평했다.

◇ 공동번영 = 경제협력 분야에서도 한반도 경제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과감한 합의들이 이뤄졌다.

우선 안변과 남포에 조선협력단지를 건설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조선산업은 우리나라가 세계 제1의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인건비 상승 등으로 어려움이 예상돼 국내 업계는 중국을 대체할 새로운 투자처로 북한을 주목해 왔다.

북측도 이번 회담기간 남측 기업 관계자들에게 남포에 위치한 영남배수리공장을 공개하고 시설 및 장비의 제공 등 협력을 요청하는 등 적극적이었다는 후문이다.

북측은 영남배수리공장이 있는 남포와 함께 남측 조선소들과 가까운 동해안의 안변을 협력사업 후보지로 제시했다.

정부 당국자는 "조선산업 분야는 남측의 자본.기술과 북측의 인력이 결합돼 상생 발전할 수 있는 업종"이라며 "선박블록공장을 설립할 경우 북측 인력 1천∼2천명의 고용효과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조선협력단지 외에도 남측의 자본과 북측의 노동력이 결합돼 `유무상통'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고 있는 개성공단사업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한 조치들에 양 정상은 합의했다.

`문산-봉동(개성) 간 철도화물 수송'에 합의,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원자재 조달과 생산품 수송 등에 물류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게 됐으며 통행.통신.통관 문제를 비롯한 제도적 보장조치들도 조속히 완비하기로 했다.

정부 당국자는 "연중무휴, 상시통행과 인터넷 개통 등의 조치를 통해 개성공단이 국제 경쟁력을 갖춘 상생의 협력단지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철도개통을 비롯한 주요 경협사업들의 중대 걸림돌로 작용했던 `군사적 보장조치'도 향후 문제가 없도록 합의됐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개성-신의주 철도 및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보수 문제를 협의.추진하기로 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 북으로 막혀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우리나라가 중국은 물론 유럽대륙으로 향하는 길을 닦는다는 의미로, 남북경협에 있어서도 상당히 활용도가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수천억원의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는 점이 부담이 될 수 있다.

정부는 개성-평양 철도 개보수에 최대 2천900억원, 개성-평양 고속도로 재포장에 최대 4천400억원이 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부는 이번에 합의된 경협사업들은 체제와 제도의 차이를 초월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안정적인 기초를 준다는 인식아래 남북 모두에 도움이 되는 이른바 `생산적 투자협력, 쌍방향 협력'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화해.협력 = 10.4선언에는 남북이 보다 가까워지고 통일에 한 걸음 다가가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하는 사안들에 대한 적잖은 합의가 이뤄졌다.

우선 이르면 올해 말 이산가족면회소가 완공되는 시점에 맞춰 이산가족 상시상봉을 실시하기로 하는 등 이산가족 상봉을 확대하고 영상편지 교환사업도 추진하기로 했다.

노 대통령은 회담에서 이산가족 문제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사안으로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해결 자체가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며 근원적 해결방안을 마련할 것을 북측에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은 또 남북관계를 통일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남측이 정비할 법률적.제도적 장치로는 국가보안법과 참관지 제한 등 북측이 이른바 `근본문제'로 거론하고 있는 사안들이 꼽힌다.

정부 당국자는 "제도적 장치개선 문제는 사안의 특성상 남북 간 상호신뢰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면서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자연스럽게 해결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측에서는 대남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 노동당 규약의 개정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 당국자는 "노 대통령이 이번에 아리랑공연을 관람한 것도 상호 체제를 인정하자는 차원에서 대승적으로 취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남북은 또 양측 의회 등 각 분야의 대화와 접촉을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남북국회회담은 1980년대에 추진됐지만 열리지 못했었다.

남북 정상이 수시로 만나 현안들을 협의하기로 하면서 사실상 정상회담의 정례화가 이뤄진 점도 주목할 만하다.

정부 당국자는 "남북관계가 국가 간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북측은 정례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해 수시로 만나자는 용어로 대체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11월에 제1차 총리급회담을 개최해 남북관계 전반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총리급회담이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상설 최고위급 채널이었던 장관급회담을 대체할 전망이다.

이 밖에 남북은 ▲서해 직항로를 통한 백두산관광 ▲베이징올림픽 남북 응원단의 경의선 열차 이용 등에 합의했다.

(서울연합뉴스) 이정진 기자 transi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