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이 23일 오후 동교동 자택을 방문한 정세균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우리당의 전 지도부를 향해 호통에 가까운 질책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3년 민주당 분당, 대북송금 특검, 안기부 X파일 사건 등을 차례로 거론하면서 "대통합 과정에서 우리당이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했어야 했다"며 "그렇게 했으면 우리당을 지지했던 국민들 마음 속 응어리가 풀렸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지층의 마음을 떠나게 한 과거 사건들에 대해 우리당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감으로써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 초기부터 저조한 지지율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뼈 아픈 지적인 셈이다.

김 전 대통령측 최경환 비서관은 "김 전 대통령이 민주당 분당 등 세가지 사건에 대해 생각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며 "제대로 청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데 오늘 얘기의 초점이 있다"고 말했다.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범여권 지지층에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김 전 대통령이 먼저 우리당 전 지도부에 회초리를 듦으로써 여전히 민주신당에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전통 지지층의 불만과 응어리를 대신 해소해주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범여권 통합 과정에서 "무조건 대통합하라"며 우리당쪽에 힘을 보태줬던 김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부터 나흘간 동해안에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온 다음 날 정색을 하고 우리당 전 지도부를 질책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꾼 배경을 놓고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우리당 전 지도부를 앉혀두고 질책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거론한 사건들이 모두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집권 후 일어난 일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노 대통령과 친노(親盧) 그룹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열린우리당과의 흡수합당 절차를 마친 민주신당이 오히려 친노 색채가 강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이 신당에 대한 고삐를 바짝 조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대통합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과도한 현실정치 개입'이라는 일각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통합작업을 독려했지만, 최근에는 민주신당내 친노성향 의원들의 입을 통해 "DJ가 더 개입하면 오히려 신당에 역풍이 불 수 있다"며 부담스러워 하는 발언이 나오는 등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는 게 사실.
민주신당의 양대 주주격인 노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까지 가능한 상황이다.

이와 관련, 청와대 천호선 대변인은 지난 21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대통합민주신당과 열린우리당의 통합에 대해 "크게 봐서 질서있게 통합이 이뤄지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국민통합을 지향하는 통합주의가 구현되고 있다"며 "이런 평가에는 노 대통령을 포함한 청와대의 생각이 녹아있다고 보면 된다"며노 대통령이 민주신당과 우리당의 합당을 승인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은 지난 22일 민주신당 오충일 대표를 예방하면서 이례적으로 대화의 전 과정을 공개하고 원내 1당인 민주신당이 국회내에서 중심을 잡아줄 것과 참여정부와 좋은 파트너십을 유지해줄 것을 당부했다.

김 전 대통령이 민주신당의 주축을 형성하고 있는 386세대 정치인들에 대해 "정치를 계속하고 싶으면 국민들 속으로 뛰어들어가라"며 강하게 질책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김 전 대통령은 "국민을 직접 만나서 잘못한 것은 사과하고 앞으로 이렇게 해나가겠다고 설명하면 386 정치인들에 대해 국민이 기대를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분당과 대북송금 특검 등에 대해 젊은 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않은 점에 대한 서운함과 실망감을 내비친 것이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의 386 정치인에 대한 비판이 최근 손학규 전 경기지사 캠프에 쏠림현상을 보이는 젊은 의원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최경환 비서관은 "그런 취지가 아니다"고 부인했고, 윤호중 전 우리당 대변인도 "어느 후보 캠프에 참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보다는 정치인이 기본적으로 자기가 살려기 보다는 당을 살리려고 노력해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김 전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전해듣고 공식적 반응을 자제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말씀내용이 청와대가 논평하거나 언급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맹찬형 기자 mangel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