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이미지와 달리 포기는 `과감'
낮은 지지율..대중성 부족극복 한계

12일 전격적으로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열린우리당 김근태(金槿泰) 전 의장은 열린우리당 의장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참여정부의 핵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정동영(鄭東泳) 전 의장과 함께 열린우리당을 양분하고 있을 정도로 범여권에서 일정한 세를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이런 그가 돌연 대선후보라는 `기득권'을 마치 초개처럼 버렸다.

범여권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 실현이라는 대의를 위해 백의종군한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평소 `햄릿형' 정치인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의사결정에 신중한 편인 김 전 의장은 자신을 버릴 때는 과감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경선에 참여하긴 했지만 첫 권역별 경선지인 제주.울산 경선에서 최하위를 기록하자 3월12일 당시 7명의 후보 중 가장 먼저 경선포기를 선언했다.

이런 전례를 감안하면 그의 이번 `드롭'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5%를 넘지못하는 현실정치의 두터운 벽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보건복지부 장관에서 당으로 컴백하면서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대중성 부족을 극복하기 위해 헤어스타일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줬지만, 결국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대통합 교착국면과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중도포기 선언으로 이어졌다는 관측인 셈이다.

그러나 김 전 의장의 불출마 선언은 올 들어 2차례 이어진 지난 1월의 고 건(高 建) 전 총리, 지난 4월의 정운찬(鄭雲燦) 전 서울대 총장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정통 행정관료 출신인 고 전 총리와 상아탑에서 지식과 경륜을 쌓아왔던 정 전 총장은 대선등정의 필수요건인 자금과 세력이 없었지만, 김 전 의장은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민주화.개혁성향의 우리당 의원들과 시민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당주변에서는 김 전 의장의 `결단'을 `밀알론'에 견주어 후한 평가를 하는 분위기가 우세하다.

김 전 의장이 기득권 포기를 통해 범여권의 대통합을 주문하고 나섬에 따라 그간 통합의 방법론을 놓고 갑론을박하던 범여권 내부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통합의 한길로 나가도록 하는 자극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김 전 의장측 이인영 의원은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 추진이 지지부진한 채 분열이 고착화되는 상황에서 작은 것이라도 던져야 한다는 게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느냐"고 김 전 의장 결심배경에 대한 해석을 내놨다.

김 전 의장은 자신이 고심 끝에 제안한 5.18 국립묘지 공동참배 후 대선주자 연석회의 구성 제안이 무산된 이후 불출마를 현실적인 문제로 검토했고, 10일 6.10 민주화항쟁 20주년에 맞춘 주자 연석회의, 12일 정대철 고문이 주선한 주자간 회동마저 불발되자 심각한 고민에 들어갔으며, 11일 오후 불출마를 최종 결심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최종 결심을 마친 후 이날 오전 자신이 속한 민평련 의원들에게 불출마 배경을 설명하려 했으나 팬클럽인 `김근태와 친구들' 열성 지지자 6~7명이 밤을 꼬박 새우면서 집주변에 몰려드는 바람에 민평련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날 "대통합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내년 총선 역시 제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해 대통합 불발시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까지 치는 비장한 각오를 내비쳤다.

우원식 의원은 "간절한 심정으로 연석회의를 제안했는데 후보가 제안했다는 이유로 성사되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며 "만주화운동의 전면에 섰던 사람으로서 민주평화개혁세력의 분열을 보고만 있을 수 없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전 의장은 당초 20일께 탈당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조기에 탈당계를 제출키로 했다.

대통합의 밀알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힌 이상 하루라도 빨리 `제3지대'로 나가 대통합과 오픈 프라이머리 성사를 위한 작업에 착수하겠다는 의지에서다.

특히 대통합의 한축인 시민사회세력이 당초 예정대로 다음달 창당일정을 진행한다면 오픈 프라이머리 추진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점도 탈당을 서두른 요인이라는 설명이다.

80년대 장기표(張琪杓) 새정치연대 대표, 이부영(李富榮) 전 우리당 의장과 함께 재야의 3두마차로 불렸던 김 전 의장은 95년 민주당 부총재로 제도 정치권에 진입했으나 `재야 대표선수'라는 무게감에 비해 오랜 기간 비주류를 맴돌았다.

그는 2002년 민주당 경선 도중 "대선후보 당내 경선과정에서 엄청난 정치자금이 소요되는 정치현실을 바꿔야 한다"며 2000년 8.30 전당대회 과정에서 자신이 사용한 `불법 선거자금'을 고해성사해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03년 9월 우리당의 전신인 국민통합신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돼 신당추진을 진두지휘하고, 17대 총선에서 재야 및 386 운동권 출신의 대거 당선에 힘입어 당내에서 정동영 전 의장과 함께 양대 계파를 형성, 일약 주류로 떠올랐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권수업'까지 받았으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 등을 놓고는 "계급장을 떼고 얘기하자"고 말하는 등 노무현 대통령과는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우리당이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이후 당의장직 바통을 이어받아 어수선해진 당 분위기를 일신하고 기간당원제 폐지 등 당의 시스템 개선에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특히 지난해 10.26 재보선 참패 이후 당해체론이 불거져 당사수파와 통합파간 분열상이 극대화하는 상황에서 `질서있는 정계개편론'을 내세워 2.14 전당대회를 성사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당의 혼란상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고 계파간의 견제 속에서 리더십 논란에 휩싸이는 등 상처도 적지 않았다.

국회 출입기자들이 뽑는 `백봉 신사상'의 단골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고 선호하는 대선주자 후보 조사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했지만 여론 지지도는 3%를 밑도는 등 정치인으로서 대중성이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돼 왔다.

(서울연합뉴스) 류지복 기자 jbry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