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사흘간에 걸친 제15차 장관급회담을 통해 장문에 걸친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남북관계는 정상화 단계를 넘어 작년 7월 이전보다 관계 발전의 속도가 빨라지고 폭도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작년 7월 고(故) 김일성 주석 사망 10주기 조문 불허 등으로 막혔던 남북관계는 지난 달 16∼19일 차관급회담에서 벽이 헐렸고 지난 17일 정동영 통일부 장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면담으로 완전 복원됐으며, 이번에 한 단계 더 나간 것이다.

이는 종전에 많아야 7∼8개항이던 공동보도문 항목이 이번에는 12개항이나 되고 A4 용지 3장에 걸쳐 작성된 것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양적 확대 못지않게 질적으로도 상당한 진전을 이뤄냈다고 보는 분석도 적지 않다.

정부는 이번 회담을 "작년 7월 이후 정체됐던 남북관계가 완전히 정상화되고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을 위한 제2의 6.15 시대를 개막했다"고 자평했다.

실제 이산가족상봉과 경제협력추진위원회, 장성급군사회담 등 남북간 기존 회담 및 행사 일정을 잡아, 남북관계의 동력을 되살리고 수산협력실무협의회와 농업협력위원회 등 새로운 동력까지 확보함에 따라 향후 각종 회담이 줄을 이을 전망이다.

그러나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다루게 될 적십자회담과 서해상 긴장 완화 문제를 논의할 장성급 군사회담의 경우, 그동안 묻어두었던 민감한 사안을 협의한다는 점에서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번 회담의 최대 성과는 한반도 비핵화를 최종목표로 잡은 핵 문제이다.

북측이 지난 2월 10일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고 마지막 6자회담이 개최된 지 1년이 지난 상황에서 비핵화 원칙과 함께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방침을 천명한 것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긍정적인 환경 조성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 나가기로 명시한 점은 종전 보도문에서 볼 수 없던 진일보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6.17 정동영-김정일 면담'에서 "비핵화는 고(故) 김일성 주석의 유훈"이라고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낸 바탕 위에 공동보도문이라는 공식 문서의 합의사항로 명문화했다는 의미도 부여할 수 있다.

군사적 긴장 완화 방안을 협의하게 될 제3차 장성급군사회담을 7월 중 백두산에서 개최키로 하고 수산협력 문제를 논의하는 회담체를 탄생시킨 것도 성과다.

장성급군사회담은 작년에 두 차례의 만남을 통해 이른 바 `6.4 합의서'로 불리는 `서해상 우발충돌 방지 및 군사분계선 지역의 선전활동 중지 및 선전수단 제거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는 무게 있는 합의를 일궈낸 바 있다.

이에 따라 다음 달 제3차 회담에서도 `6.4합의서'에 따른 후속조치 논의를 본격 진행하면서 군사 분야 신뢰구축에 기여하고 2000년 한 차례 열린 이후 5년간 열리지 못하고 있는 국방장관회담도 재추진할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번 회담에서 양측이 함께 제안하면서 태어난 수산협력실무협의회은 남북간 수산자원의 공동 이용과 제3국 어선의 불법어로 차단을 추구하고 있는 만큼 협의 결과에 따라서는 서해상에 `공동어로수역'이 생길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어로 협력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상호이익 증대를, 정치ㆍ군사적으로는 교전까지 초래했던 민감한 해역에서의 긴장완화를 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도적인 측면에서는 작년 7월 제10차 상봉 이후 중단됐던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다시 차수를 이어 제11차 상봉이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착공과 함께 8월 26일 재개키로 하고 화상상봉에 합의한 것은 상봉 대상을 크게 늘리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특히 면회소 착공은 이산가족 문제의 제도적 해결의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적십자회담은 당초 7월 개최안에서 8월로 늦춰지기는 했지만 2003년 1월 제3차 적십자실무접촉에서 이산가족 면회소 착공에 맞춰 논의키로 합의한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를 회담테이블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공동보도문에는 `전쟁시기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생사확인 등 인도적문제를 협의하기 위해'라고 그 목적이 명시돼 있지만 협상과정에서 그 이후 시기까지의 납북자 문제까지 포괄해 나가겠다는 게 정부 입장이다.

하지만 북측이 국군포로의 존재 자체를 부인해온 민감한 사안이어서 적십자회담이 열리더라도 적지 않은 진통이 뒤따를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이와 함께 남북경협을 이끄는 중심체인 경제협력추진위원회 제10차 회의의 7월 9∼12일 서울 개최에 합의한 것은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 설치와 이미 합의한 9개 경협합의서의 발효를 앞당겨 경협 활성화의 발판을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협위에서는 또 이번 보도문에 명시한 식량차관 제공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이미 차량이 통행 중인 경의선 도로의 공식 개통식과 남북 물류에 혁신을 가져올 경의선 철도 시험운행, 임진강 수해방지작업의 본격화 문제 등도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쌀 차관은 이미 합의한 만큼 예년 수준인 40만t 수준에서 지원될 전망이다.

이와 함께 장관급회담 산하에 7월 중순부터 농업협력위원회를 운영키로 한 것은 북측의 식량난 해소는 물론이고 농업구조 개혁에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으로 농업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특히 농업협력은 현행 쌀 차관 제공과 비료 지원을 비롯한 인도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구호 형태에서 벗어나 개발지원 방식으로 지원 방법에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고 물적, 기술적, 인적 교류에도 물꼬를 틀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북측 민간 선박의 제주해협 통과를 우리측이 허용한 것은 이번 회담의 모토가 됐던 실사구시 정신에 따른 것으로, 북측 선박의 비용절감을 돕고 해상에서의 평화정착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은 `을사5조약' 100년을 맞아 남북 당국이 이 조약을 원천무효라고 선언한 것이다. 북측이 지난 22일 제안할 때만 해도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공동보도문에 명시함에 따라 불행했던 일제 강점사를 두고 남북이 공통된 인식을 보였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이번 회담의 합의 못지 않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점은 회담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는 점이다. 원탁을 회담 테이블로 처음 사용하고 밤샘 협상이 사라졌는가 하면 공동보도문을 남북이 각각 낭독한 것은 괄목한 만한 변화인 셈이다.

이런 변화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향후 회담에서도 이어질 지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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