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사병이 군내 성추행을 비관하다 자살한 사건이 최근 발생한 데 이어 대대장인 현역 중령이 부하 사병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 군내 동성간 성범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군내 성범죄가 광범위하게 벌어졌음에도 피해자들이 수치심 때문에 공개를 꺼린데다 상명하복이 엄격한 군부대 특성 등으로 인해 세상에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으나지난 9일 휴가나온 사병의 자살 사건을 계기로 그 동안 은폐됐던 추악상이 조금씩모습을 드러냈다. 육군 모부대 소속 김모(21) 일병이 포상휴가를 마치고 귀대를 앞둔 지난 9일 경기 의정부시 소재 25층 아파트 옥상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조사 결과 김 일병은 지난 5월 내무반에서 일석 점호 이후 같은 부대 고참 김모 상병으로부터 2차례에 걸쳐 강제성추행을 당한 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심한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고민한 것으로 밝혀졌다. 군 당국은 사병들이 폐쇄된 군부대 안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과정에서 동성 간성범죄가 벌어졌다면서 지휘관들이 정례적으로 내무반 내 성범죄 실태를 점검하고정신교육을 강화시켜 재발을 방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군의 이 같은 발표가 나올 때만 해도 성범죄는 사병 사회에 국한된 문제인 것으로 생각됐다. 그러나 대대장급 간부가 성범죄를 저지른 사건이 불거지면서 성범죄는 통제불능의 상황으로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내무반을 점검하고 병장 이하 사병들을 모아놓고 정신교육을 시키는 방법은 더 이상 무의미해진 것이다. 군내 성범죄 예방을 위해서는 피해자 인권이 보호되는 것을 조건으로 범죄내용을 적극 공개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사건 은폐는 범죄분위기를 더욱 조장할 소지가다분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군 당국은 성범죄 예방과 근절을 위한 노력이 미흡했다는 비난을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국회와 천주교인권위원회 등으로부터 군내 성범죄를 우려하는 경고음이끊임없이 제기됐음에도 하급 군부대에서 발생하는 성범죄가 육군본부나 국방부에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 민주당 정대철 의원은 지난 2000년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98년 이후 2년 6개월간 현역 장병들의 성범죄는 강간 244건과 동성 간 추행 133건을 포함해 666건이 발생, 성범죄가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고 경고했다. 정 의원은 당시 휴가나온 사병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상자의 10.5%가 성폭력이나 성희롱을 강요받거나 보고 들은 것으로 대답했다고 밝혔다. 피해 형태는 성행위 흉내내기가 30.2%로 가장 많았고, 신체 애무 15.9%, 성경험담 발표 14.5%, 동침행위 12.7%, 자위행위 9.5%, 성기 애무 3.2% 등의 순이었고 계급이 낮을수록 피해율이 높았다. 천주교 인권위도 지난해 현역 장병 37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남자들만 생활하는 군부대에서도 성폭력이 존재하고 있다면서 군내 여군 성범죄는 개선되고 있으나 남성 간 성범죄는 사각지대에 놓여있다고 우려했다.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은 13일 대대장의 사병 성추행 사건을 보고받고 홍갑식 육군참모차장을 단장으로 하는 성범죄근절을 위한 대책반을 구성, 운영토록 지시했다. 대책반은 전국 예하부대별로 벌어지고 있는 고참이나 지휘관들에 의한 성폭행및 성추행 실태를 조사해 가해자가 적발될 경우 엄단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특단의대책을 마련하겠다는 게 육군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면피용 대응책에 그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어려울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손모 중령이 성추행 혐의로 구속된 지 8일이 지나도록 육군본부에 이 사건이 전혀 보고되지 않은데다 대책반 구성도 편성 인원 및 구체적 역할과 권한 등이 구체적으로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둘러 발표됐기 때문이다. 최근 수년 동안 줄기차게 제기된 군내 성범죄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을 제시하지못하다가 손 중령의 범행에 대한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자 휴일인 13일 대책반 구성을 서둘러 발표한 것인 만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인 것이다. 군이 국토방위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대한 신세대 장병들의 소중한 생명을 더이상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한 엄포용 지시나 대외 과시용 대책반 구성 보다는 성범죄 유발 요인과 취약한 부대 환경 등을 정밀 진단해 대책을 마련하고 피해자의 신고를 접수, 해결할 수 있는 창구를 대폭 확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손 중령의 범행이 피해 사병이 평소 친근하게 대해주던 군의관을 찾아가 견디기힘들었던 수치스런 상황을 설명하고 다른 부대로 옮겨주도록 상담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사실은 부대내 상담 창구 확대가 시급함을 일깨워주는 본보기다. (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had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