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이끄는 중국호가 출범한 지 1백여일이 지났다.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라는 국난을 겪으면서 후의 신중국은 예상보다 빨리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후 주석은 창당 82주년 기념일인 7월1일 강화를 통해 '3개 대표이론의 계승'을 강조했다. 베이징 관측통들의 예상과는 달리 당내 민주화를 통한 정치개혁과 사유재산권 보호 등을 선언하지 않고 장쩌민(江澤民) 시대의 정신을 이어갈 것임을 재차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잘못된 행정 및 사회관행을 뜯어고치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언론을 통해 정치개혁의 필요성도 강조하고 있다. 지방단위에서는 정치개혁 실험이 차츰 확산되고 있다. 이 모든 변화의 핵심에는 후의 실용주의 노선과 인민 우선주의가 깔려있다. ◆형식주의 벗어난다=후 주석이 취임 후 보여준 행보에는 형식과 권위를 벗어던지고 실질을 숭상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지난 5월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3백주년 기념식 참가와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 참가를 위해 출국할 때 인민대회당에서 이뤄지던 국가지도자 환송행사를 폐지했다. 중국 최고지도자들이 여름마다 별장에 모여 사안을 논의하는 베이다이허 회의도 올해부터 갖지 않기로 했다고 홍콩 언론들은 전하고 있다. 밀실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7·1 창당 82주년 기념식을 아예 갖지 않고 세미나에 참석,연설함으로써 형식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사스 지역을 수행원들과 함께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순시하며 도중에 차를 세워 현지 주민들의 얘기를 경청하는 모습에서도 과거 중국 최고지도자의 권위를 느끼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당 총서기에 오른 직후 처음 들른 당의 혁명기지인 허베이성 시바이포에서 공산당 간부들에게 "겸손하고 신중하며 교만하지 말라"면서 인민을 위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7·1 강화에서도 인민을 위한다는 말은 수차례 반복된다. '관(官)보다는 민(民)에 대해 쓰라'고 지시한 그의 언론관도 이와 무관치 않다. 광저우에서 거류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한 민공이 수용소로 끌려가 얻어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관련자들을 중형에 처하고 20여년간 지속된 관련 제도를 폐지한 것도 인민 우선주의에 따른 것이다. ◆책임은 엄중히 묻는다=후 주석은 사스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4월 베이징 시장 멍쉐눙과 위생부장 장원캉을 전격 경질했다. 이어 수백명의 공무원들이 사스 실태 은폐와 늑장보고 등의 이유로 면직되거나 정직당했다. 근무시간에 사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오던 공무원 사회에 칼을 빼든 것이다. 잠수함 361호의 승무원 전원 사망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수뇌부 4명을 해임하기도 했다. 서방 언론들은 "중국 당정군의 고위 인사가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는 한 해직당하지 않고 임기가 보장되는 전통이 깨진 것"이라며 "중국이 책임행정과 투명행정을 향해 한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국유기업 경영자가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입힐 경우 영원히 어떤 다른 국유기업의 경영자도 될 수 없도록 한 것도 책임을 중시하는 후 주석 시대 신중국의 모습이다. ◆점진적 정치개혁으로 권력장악=후 주석이 정치개혁에 나설 것으로 기대되면서 지방을 중심으로 직선제가 차츰 확산되고 있다. 후난성 창사의 쓰팡서취는 지난 6월 중순 주민위원회 주임을 직선으로 선출했다. 이번 직선은 직접·평등·비밀투표 방식으로 진행돼 주목을 받았다. 장쑤성 간위현은 앞서 6월초 무기명 직접투표 방식으로 주민 쑹스민을 부현장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최하급 자치단체인 촌급에서만 직접선거를 실시해왔으며 현급 간부를 직접선거로 뽑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난 5월엔 중국 개방 1호도시 선전에서 공산당의 추천을 받지 않고 출마한 후보가 인민대표대회(인대·지방의회격) 대표로 선출되는 일이 발생했다. 선전시 푸텐구의 인대 대표 선거에 출마한 왕량 선전고급기술공업학교 교장은 중국 최초로 독자 출마해 인대 대표로 당선됐다. 특히 신화통신 자매지인 '랴오왕'은 최근호에서 향장과 현장의 직선제를 주장하는 국가행정학원 보구이리 부주임의 글을 실었다. 하지만 후 주석은 당내 경선제 등의 민주화를 천명하지는 않아 중앙이 주도하는 정치개혁은 시간이 걸릴 것임을 예견케 했다. 후 주석은 사스 위기를 성공적으로 수습하면서 인민들의 신뢰를 얻은 데다 최근 장쩌민 중앙군사위 주석으로부터 재경영도소조 조장 등 주요 당내 요직을 잇따라 접수했으면서도 정치개혁에서는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급격한 정치개혁에 나설 경우 당정군 요직에 포진해 있는 장쩌민의 세력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후 주석의 정치개혁 행보는 당분간 겉으로는 조용히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오광진 특파원 kj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