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임원에 해당하는 정부 1급 공무원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면서 관가에 태풍전야의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행정자치부와 해양수산부가 이미 1급 공무원들로부터 사표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자 중앙정부부처 공무원들은 "예전에 없었던 일"이라며 당혹감과 충격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다. 중앙부처의 '관리관'과 '별정직 1급상당'에 해당하는 1급 공무원 임면권은 정부가 갖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이들에게 일괄 사표를 내라고 요구할 수 있지만 일괄 사표의 전례가 없어 공무원들이 느끼는 충격은 더욱 큰 모습이다. ◆ 청와대와 사전교감 있었나 김두관 행자부 장관이 청와대와 사전 교감 아래 1급 공무원 전원의 사표를 받은 것인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청와대의 의중이 실린 것이라면 다른 부처들도 일괄 사표를 요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찬용 청와대 인사보좌관은 19일 "임용 제청권자인 장관에게 인사의 자율성을 부여했고 일괄 사표 제출과 관련해 청와대가 지침을 준 것은 없다"며 "장관이 자율적으로 알아서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청와대가 정부부처의 1급 인사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관가에서 보는 시각은 조금 다르다. 옛 내무부와 총무처를 합친 행자부가 1급 인사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부처의 동참을 이끌어 내려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이 기자실 폐지와 통합브리핑룸 설치 등을 앞장서 주장하고 다른 부처들이 자연스럽게 따라가도록 유도하는 방식이 똑같이 적용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 1급인사 대폭 물갈이 가능성 청와대는 지난 3일 차관급 인사를 마무리한 뒤 1급 공무원 인사의 재량권을 각 부처 장관들에게 줬다. 그러나 2주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수 부처들은 구체적인 인사안을 짜지 못한 상태다. 인사 적체가 심각한 부처에서는 1급 인사를 아예 미루려는 움직임도 감지돼 왔다. 이 때문에 청와대 주도로 정부가 1급 공무원들의 일괄 사표를 받은 뒤 대폭적인 물갈이 인사에 나서지 않겠느냐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공석인 국제업무정책관(별정직 1급 상당)에 대한 공개모집 절차만 진행하고 있을 뿐 그 밖의 1급 인사에 대한 방침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이 경제현안들을 챙기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1급 보직에 비해 대상자 수가 너무 많아 인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전언이다. 재경부가 지난 12일 퇴임한 정의동 코스닥위원장 후임을 정하지 못한 채 공석으로 둔 것도 1급 인선의 가닥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행자부의 1급 일괄 사표 제출로 재경부는 더이상 1급 인선을 미루기 어려운 형편이다. 정보통신부는 기획관리실장과 우정사업본부장 자리가 비어 있지만 오는 28일 청와대 업무보고 이후로 인사를 미뤄 놓고 있다. 국세청은 1급 보직인 본청 차장과 서울지방국세청장 등이 대부분 이용섭 청장 후보자의 행정고시 선배들이어서 이들의 거취에 관심이 쏠려 있다. 외교통상부는 노무현 대통령이 윤영관 장관에게 쇄신 인사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산업자원부 건설교통부 등 일부 부처는 이미 1급 승진대상자와 전보대상자 명단을 청와대에 통보하는 등 내부적으로는 인사를 끝냈다. ◆ 조직안정성 저해 우려 1급 공무원들의 일괄 사표 제출이 전 부처로 확산될 경우 부작용이 클 것이라는 우려도 많다. 재경부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가 각 부처 장관에게 인사권을 위임한다고 발표해 놓고 한편에서는 사퇴 압력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산자부 관계자는 "청와대가 만약 1급 간부들의 일괄 사표를 요구했다면 스스로 공언한 인사원칙을 깨는 것"이라며 "30년 가량 공직에서 일한 사람들을 마땅한 자리도 없이 내치는 것은 너무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국·과장급 간부들이 말년에 아무런 대책 없이 내쫓길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면 조직 안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현승윤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