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두번째이자 마지막 대권도전'에 실패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20일 낙루 속에 정계은퇴 회견문을 낭독하고 6년간의 짧은 정치역정을 마무리했다. 이 후보는 1993년 문민정부의 등장과 함께 개혁·사정 작업을 주도해 '대쪽 법관' '성역을 타파한 감사원장' '소신 총리'라는 '별칭'을 얻으며 '거물급' 인사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총리의 권한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YS)과 마찰을 빚어 야인으로 돌아갔고 그런 이 후보를 두고 정가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대선을 1년여 앞둔 96년 2월 YS의 권유로 이 후보는 정치라는 새로운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당시 김 대통령의 경고에 맞서 "비민주적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고 '보스 정치'에 정면으로 저항한 끝에 정계 입문 1년11개월만에 제1당 대선후보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대선 과정에서 두 아들 병역문제 등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이인제 후보의 탈당 등으로 97년 대선에서 39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98년 8월 그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제1야당 총재로 전면에 복귀했다. 2000년 5월 전대에선 김덕룡 후보 등의 도전을 물리치고 연임돼 당 총재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특히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는 김윤환,이기택,신상우 전 의원 등 당내 계파 수장과 중진들을 과감히 물갈이하며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올 6월의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의 승리는 이런 이 후보의 입지에 더욱 힘을 실어줬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민주당의 국민경선제 도입으로 시작된 정치권 변화의 바람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빌라 게이트' 등으로 인한 지지도 추락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선거전이 본격화된 이후에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한 홍보전에서 참패한데다 방만한 조직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97년처럼 끝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새정치'와 '단일화 효과'의 높은 벽을 넘지는 못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