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 94년 미국과 맺은 제네바 합의에 따라 동결해왔던 핵시설 가동을 즉시 재개키로 함에 따라 북·미 관계는 물론 남북 관계도 벼랑 끝으로 치달을 위기에 처했다. 북한의 이같은 태도는 제네바 합의의 전면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어 사태의 진전에 따라 한반도를 둘러싸고 극단적인 핵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북한의 의도·배경=북한은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밝힌 핵시설들의 가동과 건설을 즉시 재개하는 표면적인 이유로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에 따른 전력 생산의 차질을 꼽았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지난달 미국 뉴욕에서 북한이 지난 10월 핵개발계획 추진을 시인한 데 따른 제재 조치로 이달분 대북 중유 제공 중단을 결정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겨울철 심각한 에너지난에 직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북한은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을 중단하는 대가로 KEDO로부터 경수로 2기 건설과 미국의 중유 지원을 약속받았었다. 그러나 경수로 건설은 당초 약속한 2003년까지 건설이 불가능해졌다. 여기에다 미국이 중유 공급을 중단하면서 압박하자 북한은 핵시설 건설 재추진이라는 초강수를 들고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에서 "우리에 대한 중유 제공은 그 무슨 원조도 협조도 아니며 오직 우리가 가동 및 건설중에 있던 원자력발전소들을 동결하는 데 따르는 전력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미국이 지닌 의무사항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미국이 이러한 의무를 실제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전력 생산에는 당장 공백이 생기게 됐다"고 말한 것은 북한이 더이상 양보할 수 없다고 선을 그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지난 9일 미국이 스커드 미사일을 싣고 예멘으로 향하던 북한 화물선을 공해상에서 나포한 것도 북한을 자극했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북·미,남북 관계=북한의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미국은 이번 사태를 방관하지 않을 게 확실해 보인다. 미국은 대 이라크전에 힘을 쏟아야 하기 때문에 당장 북한에 대해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자제할 것으로 보이지만 경제 제재나 외교적인 압박을 통해 북한을 궁지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될 경우 북한의 개방정책과 경제개선 조치들은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북한이 이에 맞서 '벼랑끝 전술'로 맞설 수 있어 한반도는 예측 불허의 위기상황으로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와 함께 개성공단 건설이나 금강산 육로 관광 등으로 탄력이 붙고 있는 남북 관계에도 제동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홍영식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