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3 00:40
수정2006.04.03 00:42
지난 3-4월 사상 첫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민주당후보로 뽑힌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통합21 정몽준(鄭夢準) 대표와 극적인 후보단일화에 성공, `단일후보'로서 이번 16대 대선에 출정하게 됐다.
앞서 노 후보는 강도높은 바람을 일으키며 민주당 후보로 뽑혔으나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과의 회동 등 악재가 겹치면서 지지율 급락과 당내 분란 계속이라는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6.13 지방선거에 앞서 영남권 전패시 재신임을 약속하고 8.8 재.보선 후에는 재경선을 공언했다가 지지율이 반등하지않자 단일화를 명분으로 내건 세력들로부터 사퇴압력을 받고 탈당사태를 겪는 등 곡절을 겪었으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수용하는 등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 고비를 넘겼다.
노 후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 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인 규명작업에 나섰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일부 신문에 대서특필되면서부터.
이에 앞서 그는 판사 생활 8개월여만에 "따분하다"고 걷어치우고 78년5월 변호사로 개업한 뒤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81년 부산 민주화.학생운동 사건이었던 `부림사건' 변론을 맡아 고문당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운동권' 변호사로 변신했다.
이어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을 맞은 후 이석규씨 사건으로 구속되고, 변호사업무정지처분까지 받은 것을 계기로 또다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88년 4.26총선(13대)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재야 케이스'로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5공 실세 허삼수(許三守) 후보의 `대항마'로 자원해 초반의 불리한 판세를 뒤집고 승리함으로써 제도권 정치에 입문한 것.
초선 노무현은 88년 5공청문회에서 다른 의원들이 깍듯이 예우한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회장 등 힘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 및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로 시청하던 국민의 주목을 받으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이어 노 후보는 90년1월 3당 합당이란 운명을 건 선택을 앞에 놓고 "역사적 반역"이라며 합류를 거부, 훗날 `정체성'과 `동서통합'이라는 명분에서 그의 큰 정치적 자산이 됐다.
그러나 그 이후 92년 총선, 95년 부산시장 도전, 96년 총선에서 잇따라 패배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결국 그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와 동서통합'을 명분으로 국민회의에 합류, 정권교체 후인 98년7월 보선에서 종로에 다시 도전해 오랜만에 금배지를 달았으나 2000년 4월 총선에서 다시 부산 표심을 두드렸다가 고배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지역주의 깨기란 명분을 내건 도전정신'을 높이 산 네티즌들 사이에 `바보 노무현'으로 애정어린 주목을 받으며 `노풍'의 씨앗을 키웠다.
그는 이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탁돼 국정경험 기회를 가지면서 대선주자로부상한 뒤 이인제(李仁濟) 의원을 물리치고 민주당 후보로 등극, 숱한 고비를 넘기고 끝내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기자 kh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