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나라의 관계는 20세기의 유물이 되고 앞으로는 이웃이 될 것입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테이블에서 꺼낸 이 첫마디는 북한 외교가 지향하는 목표가 함축돼 있다. 김 위원장이 회담 직전 교도통신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고이즈미 총리와의 만남은 북·일 관계 개선의 획기적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 의례적 수사가 아님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우선 이번 회담을 계기로 북·일 양국간 국교정상화 교섭은 급물살을 탈 것이 분명해졌다. 경제협력 형태로 일본이 북한에 제공할 막대한 자금 공급이 시기 선택문제로 좁혀지면서 북한 경제의 대외 개방과 개혁 실험에도 한층 가속도가 붙게 됐다. 일본측 경협자금은 북한이 경제난에서 벗어나 시장개방을 추진할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이 틀림없다. 회담의 주요 의제중 하나인 미사일실험 추가동결,핵사찰 등에서 북한이 유연하고도 전향적인 자세를 보임에 따라 동아시아 정세의 긴장 완화와 평화 유지에도 상당한 플러스 효과를 안겨주게 됐다. "북한이 대결형의 군사,외교정책에서 협조형의 노선으로 전환한 것이 명백해지면 (이번 정상회담은) 국제 정치에서 닉슨의 중국 방문에 필적할 대사건이 될 것이다."(다나카 아키히코 도쿄대 교수) 일본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정상회담 후 북한 경제 외교의 폭과 속도가 전에 비해 훨씬 넓어지고 대담해 질 것이라는데 이의를 달지 않고 있다. 경제 개혁에 발을 내밀긴 했지만 엔 차관과 화교자본이 든든한 돈 줄 역할을 해주었던 과거의 중국과 달리 현재의 북한은 한국의 지원 외에 특별히 기댈만한 구석이 없다는 것이 분석의 첫째 근거다. 이즈미 하지메 시즈오카 교수는 "대외 개방에서 북한의 지도부가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대 우방인 중국으로 부터 북한이 작년에 얻어낸 지원이 20만?의 식량과 3만?의 경유 뿐이었다면서 북한이 일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이같은 사정과 무관치 않다고 해석했다. 두 정상의 만남은 북한에 경제난 해결 가능성과 함께 대화,협조를 기대할 수 있는 국가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효과를 남겼다. 고이즈미 총리는 납치피해자 문제에 발벗고 나서면서 자국민 보호에 앞장섰다는 기록과 함께 국교 정상화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인상을 남기며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건 도박에서 만만찮은 성과를 올린 셈이 됐다. 북·일 회담은 그러나 표면적 합의에도 불구, 북한에 대한 의심과 우려를 떨치지 않고 있는 미국을 설득하고 진의를 입증해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두 정상이 회담 테이블에 앉기 직전인 이날 오전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북한은 대량살상무기의 원흉이며 아직 핵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며 쐐기를 박은 것은 북·일 관계 정상화 앞에 깔린 난제가 어떠한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도쿄=양승득 특파원 yangs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