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의 벽을 뛰어넘어 혈육의 정을 확인하는 데에는 불과 수초만이 필요했다. 6.25 전쟁때 군대에 간다며 집을 떠난뒤 소식이 끊겨 죽은 줄로만 알았던 북측의 오빠 김소동(75)씨가 눈앞에 나타나자 남측 여동생 용순(68.여.부산 사상구 모라동)씨는 머리를 수그린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용순씨는 국립묘지에 위패가 모셔지고 제사까지 지내온 오빠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빠 소동씨가 "울지 마라. 이렇게 좋은 날 왜 우나"라며 다독거리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용순씨는 한참동안 울고난뒤 정신을 가다듬고 우선 고인이 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일을 오빠에게 알려줬다. 수동씨는 남동생마저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그러면 누가 제사를 지내느냐"고 걱정하며 "통일이 되면 내가 모시겠다. 나는 100살까지 살테니까 건강하게 오래 살아라"라며 여동생을 위로했다. 용순씨는 세월탓에 많이 변해버린 오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어릴 적에는얼굴이 퉁퉁하니 참 건강하고 좋았는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수동씨는 "학교에 안 간다고 회초리로 내 종아리 때리고 했잖아. 그때 오빠 말대로 공부를 했어야 하는건데"라는 여동생의 때늦은 푸념에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용순씨는 "북에서 결혼해 자식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오빠의 말에 마음이 놓이는 듯 거칠어진 오빠의 두 손을 어루만졌다. 오빠 수동씨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싹트기 시작한 건 4,5년 전. 당시 국군포로 출신으로 북에서 살다가 국내에 입국한 양순용씨가 모방송국 프로그램에 출연해 오빠 수동씨의 이름을 거론했기 때문. 양씨는 당시 방송국에 수소문해 어렵게 찾아온 용순씨에게 "집에 방앗간 있습니까. 멸치를 잡았나요" 라고 물었고 용순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러면 김수동 맞다"고 답했다. 양씨는 "오빠 수동씨가 국군포로로 붙잡혀 나와 함께 탄광에서 일했고 북에서결혼해서 자식을 낳았다"고 설명했다. 용순씨는 "오빠가 살아 있다면 가다가 죽더라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재작년 방북 신청을 냈고 결국 이번에 그 소원을 이루게 됐다. (금강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