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취재단 = "아버지, 아버지..." 16일 오후 금강산여관 이산상봉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수 백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가운데 유독 아버지 손진황(89)씨가 눈에 띈 순간 딸 종학(71)씨는 아버지에게 달려가 펑펑 울 수 밖에 없었다. 58년만의 만남이다. 해방 직후 일본에서 조총련으로 활동하다 소식이 끊겼던 아버지였다. 두 남동생이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쉬쉬하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불효의 대상이었다. 그러다 지난해 20여년전 북송선을 탔다는 소문만 들렸던 아버지가 귀가 어두운구순의 노인이 돼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야속했었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아버지 없이 결혼하며 식장에서 목놓아 울어야했다. 45년전 어머니 돌아가실 때도 아버지 생각이 간절했다. 진황씨는 4남매의 맏으로 부모 역할까지 해야 했다. 보고 싶으면서도 또한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속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었던 애절한 그리움은 외마디로 "아버지, 아버지"라고만 울부짖게 했다. 손씨는 "울지 마라, 이 좋은 날 왜 우느냐"고 달래다가 그 역시 결국 함께 눈물범벅이 돼야 했다. 한참 뒤 울음을 훔쳐내고서야 손씨는 "일찍이 숨진 부모님 소식을 듣고서 고향경주에 가서 아버지, 어머니 산소 찾아 뵙고 불효에 대해 용서 빌어야 하는데 매일눈물로만 지샜다"며 통한의 세월을 탓했다. 손씨는 딸에게 지난 79년 북송선을 탔던 얘기, 이듬해 진황씨의 새어머니가 되는 류복이(67)씨를 만난 사연 등을 전했다. 딸은 "아버지도 당신 때문에 자식들에게 불이익이 있을까봐 남쪽으로 내려오지않고 북송을 택했을 것"이라면서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듯이 "아버지 역시우리의 불효를 이해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딸은 처음 만난 새어머니 류씨에게 "아버지를 잘 돌봐주셔서 감사드린다, 아버지가 혼자 계실까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면서 감사의 큰 절을 올렸다. 류씨는 "아버지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 얘기를 안 한 날이 없었고 눈물을 흘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면서 애틋했던 부정(父情)을 전했다. 동생들이 아버지에게 전하는 편지 두 통과 함께 가족 사진을 잔뜩 가져온 딸 진황씨는 다리를 다쳐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아버지에게 남은 생애를 곁에서 모시지못하는 불효를 탓하며 지팡이를 선물했다. 지난 1959년 12월 일본 니가타에서 첫 북송선이 재일교포 975명을 태우고 북으로 간 뒤 지금까지 손씨와 같은 북송자는 9만4000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 다른민족의 아픔이고, 또 다른 형태의 이산가족이다. (금강산=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