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민주당 탈당을 결심함에 따라 그의 인생에서 지난 반세기동안 이어져온 정당과의 인연을 끊게 됐다. 김 대통령이 처음 독자적으로 만든 정당은 지난 87년 6.29 선언 이후 통일민주당에서 당을 함께 하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뒤 그해 11월에 만든 평화민주당. 김 대통령은 이에 앞서 지난 85년 김 전 대통령과 손잡고 세칭 `민정당 2중대'라던 민한당에 맞서 이민우(李敏雨) 총재를 내세워 신민당을 만들어 2.12 총선에서돌풍을 일으켰으나, 87년 역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신민당을 탈당, 통일민주당을만들었으니 공동창당 기록도 2개 가진 셈이다. 13대 대선에서 3등을 기록했던 김 대통령은 88년 총선에서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원내 제1당으로 화려하게 재기했으나 90년 전격적인 '3당 합당'으로 다시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러나 91년 4월 일부 재야세력을 흡수, 두번째 당인 신민주연합당을 창당한 데이어 9월엔 이기택(李基澤)씨의 '꼬마 민주당'까지 받아들여 세번째 당인 통합민주당을 창당, 92년 총선에서 97석을 차지함으로써 대권도전의 교두보를 구축했다. 그러나 14대 대선에서 '대권 3수'에 실패하자 김 대통령은 "오늘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다"며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김 대통령은 93년 귀국후에도 순수 연구단체를 표방한 '아.태평화재단'을 설립,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냈으나 95년 지방선거에서 조 순(趙 淳) 서울시장 후보의 연설원으로 등록한 데 이어 7월 정계복귀를 선언했고 9월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으로부터 자파의원들을 데리고 나가 네번째 정당인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97년 15대 대선에서 'DJP 후보단일화'를 성사시킨 김 대통령은 무소속의 박태준(朴泰俊) 의원과 국민통합추진회의까지 합류시켜 대권도전 네번째만에 감격의 승리를 맛보며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김 대통령은 이어 효율적인 국정운영과 개혁의 차질없는 수행을 위해선 '전국정당화'를 통해 소수정권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며 2000년 1월 재야와 신진세력을 영입, 5번째 당인 '새천년민주당'을 만들었다. 그러나 민주당이 그해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패배하고 지난해 10.25 재보선에서도 참패, 정풍파동 등 당내분에 휩싸이자 김 대통령은 `남은 임기 국정전념'을 위해총재직을 사퇴했다. 김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는 결과적으로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국민참여경선제를탄생시켰고 이어 `노풍(盧風)'을 일으키는데 성공했으나, 자신의 세 아들과 권력주변 인사들의 잇단 부정부패 의혹이 민주당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후보에게 부담으로 작용하자 결국 탈당이란 최후의 카드를 선택했다. (서울=연합뉴스) 추승호기자 chu@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