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승만 (택)통령'. 60년 2월 경남 김해 진영중학교 1학년이던 소년 노무현(盧武鉉)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생일기념 글짓기에서 `택도 없다'는 뜻의 이같은 냉소적 제목을 달았다가 퇴학위기까지 몰렸다. 노 후보가 지난 94년 펴낸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엔 초등학교 4학년때 반장이던 그가 누이에게서 물려받은 찌그러진 필통을 창피하게 여겨 짝꿍의 새 필통과 맞바꿨다가 망신을 당했던 사건이나, 6학년 붓글씨대회에서 2등을 했는데 1등을 한 학생이 종이를 바꿔 새로 쓴 것을 알고 분개해 상을 반납했던 일화도 소개돼 있다. 또 중학교 입학금이 모자라 어머니와 함께 교감을 찾아가 나중에 입학금을 내는 조건으로 입학허가를 받으려 했으나 끝내 거절당하자 "가요! ××. 이 학교 아니면 학교없나"라며 문을 박차고 나가는 바람에 교감으로부터 "공부해봐야 깡패된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력이 말해주듯 명석한 두뇌는 유소년기 학창시절부터 주변으로부터 평가를 받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생활기록부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두뇌명철' `두뇌예민' `판단력 풍부' 등이다. 6살때 천자문을 외웠고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 시절 1,2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생활기록부에는 이와함께 `불안하다' `튄다'는 현재의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일부의 평가도 이미 나타나 있다. 그의 초.중학교 담임 선생님들은 "비타협적" "경솔한 편" "극히 독선적" "불안한 거동이 많다" "필요없는 질문을 하는 버릇이 있다"는 평을 적어놓았다. 이에 대해 유종필(柳鍾珌) 언론특보는 "발명가 에디슨이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했단다. 이제 범생(凡生.모범생)의 시대는 갔다. 간단한 의미가 아니다"고 좋게 해석했다. 조숙했던 노무현은 집안사정 탓에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5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결국 큰 형의 종용으로 장학금과 은행취업을 기대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그러나 역시 머리를 깎이지 않으려고 시험시간에 도망을 치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 담배를 하는 등 모범생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성적도 중간 정도. 졸업후 농협 취직시험을 쳤으나 떨어졌으며, 나중에 정계에 입문한 뒤 방송통신대에 진학하려다 고교성적 때문에 실패한 경험도 있다고 한다. 농협 취직이 좌절된 후엔 어망회사에 들어갔으나 월급이 적다는 이유로 한 달 반만에 그만두고 신분상승을 위한 고시에 도전한다. 사시준비도 초반엔 착실하지 못했다. 중간에 공사현장 막노동에 나서고, 작은 형과 과수원을 하려고 김해 농업시험장에서 묘목을 슬쩍하기도 하는 등 방황하다 다시 공부에 전념, 4개월만에 예비시험에 합격하는 저력을 보인다. 그는 책값을 벌려고 공사판을 찾았다가 떨어진 목재에 얼굴을 맞고 결국 68년 입대, 71년 제대후 본격적인 공부에 나서 73년 결혼한 뒤 75년 17회 사시에 합격했다. 고졸 출신의 사시합격은 당시에도 화제였던지 그는 `고시계' 75년 7월호에 '과정도 하나의 직업이었다'는 합격기를 쓰기도 했다. 고시공부를 할 때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독서대를 개발, 실용신안 특허출원을 했던 일화는 지난 94년 인명관리 컴퓨터 프로그램인 `노하우 2000'을 스스로 개발해 사용한 사례와 함께 노무현의 에디슨적 기질, 실사구시적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다. 서민 이미지의 그도 골프를 친다. 구력 3년에 핸디 20. "사람들과 함께 하려면 해야 한다"며 골프채를 잡는다고 한다. 또 잘 타려고 외국에 가서 배우기까지 한 요트도 한때 그의 취미였다. 어릴 적 약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그는 매일 아침 30분의 요가로 건강을 유지한다. 존경하는 인물은 링컨과 김구. 초록물고기와 쉰들러리스트를 기억에 남는 영화로 꼽는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기자 kh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