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청 개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박지원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의 복귀다. 당정쇄신의 격랑 속에서 쇄신대상으로 지목돼 곤욕을 치르다 지난해 11월8일 "비서는 말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청와대를 떠났던 박 전 수석은 29일 ''정책특보''란 명함을 달고 김대중 대통령 곁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80여일만이다. 박 특보는 현정권 출범후 김 대통령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왔다. 초대 청와대 공보수석으로 출발해 문화관광부 장관, 정책기획수석, 그리고 다시 정책특보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이력은 김 대통령의 명실상부한 실세측근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DJ의 변함없는 신임은 그의 가장 큰 자산인 셈이다. 그러나 DJ의 이같은 총애는 그에게 멍에도 안겨줬다. DJ를 ''그림자 보좌''하는 동안 야당과 여론은 물론 여당 내부에서조차 표적이 돼 결국 낙마와 재기를 거듭하는 ''오뚝이'' 같은 정치적 부침을 거듭했다. 그는 현정권 출범과 함께 청와대 대변인으로 DJ의 입 역할을 했고 99년5월에는 문광부장관으로 입각, 대북특사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자신의 입지를 차근차근 다져나갔다. 그러나 박 특보는 2000년 9월 한빛은행 불법대출 연루 의혹으로 야당 및 당 쇄신파로부터 퇴진압력을 받아 문광부장관직에서 낙마했다가 반년만인 지난해 3월 정책기획수석으로 재기했다. 그는 정책기획수석 시절 청와대 실세로 부각돼 ''왕수석''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지난해 봄부터 몰아닥친 정풍파동의 와중에서 쇄신대상으로 지목됐고 결국 11월 DJ가 당 총재직을 사퇴하자 같은 날 미련 없이 청와대를 떠났다. 수석을 그만둔 뒤 서울 시청 앞에 사무실을 내고 조용한 시간을 보내다 이번에 다시 재기에 성공했다. 그가 정치전면에 재등장한것에 단순한 복귀 이상의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부여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전남 진도출신인 박 특보는 뉴욕한인회장 시절이던 1983년 미국으로 망명온 김 대통령을 만나 인연을 맺은 뒤 87년 미국생활을 접고 DJ 대선캠프에 합류하면서 국내 정치무대에 뛰어들었다. 92년 전국구로 금배지를 단 뒤 대변인과 언론특보 등 DJ의 언론관계 업무를 도맡았고 야당 대변인 최장수 기록(4년1개월)을 세우기도 했다. 이재창 기자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