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가 TV드라마와 연극, 출판물 등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명성황후를 그릴 때면 시아버지이자 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흥선대원군이 항상 등장한다. 16살에 고종의 비(妃)로 궁에 들어와 일본낭인에게 피살될때까지 35세라는 짧은 생애를 산 명성황후와 안동 김씨 등 당시 권문세가의 멸시와 견제를 극복하고 권력을 움켜 쥔 대원군 이하응. 1800년대 중반 철종이 사망하고 고종이 등극하면서 집권한 대원군은 세도정치에 철퇴를 가하고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강력한 정적으로 등장한 명성황후와 정치적 대립관계에 놓이게 된다. 북한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계급적 시각에서 역사를 보고 있는 북한은 명성황후를 '수구세력의 옹호자', '양반과 지주세력의 대변자', '외세에 의존해 정권을 유지한 사대주의자'로 비판하고 있다. 북한은 대표적인 역사서인「조선전사」등에서 명성황후를 '민비'로, 민승호 등 민씨 세력을 '민가일당', '민가통치집단', '민비일파' 등으로 각각 폄하하며 '사대투항주의적 외세의존정책'을 취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조선전사는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권력을 잡은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이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오랑캐로 오랑캐를 견제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이 이 땅에 열강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쓰고 있다. 조선전사는 "세력강화를 위해 일본을 끌어들인 그들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다시미국 등 구미 열강을 받아들였다"면서 "민가통치집단의 사대투항주의적 정책은 우리나라를 외래 침략자들의 세력권 확장을 위한 싸움마당으로 전변시켰으며 민족적 위기를 격화시켰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북한의 「조선백과대사전」은 명성황후에 대해 "반동적인 수구파 집단을 꾸리고 봉건양반들과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모든 진보적 경향을 무조건 탄압하며 인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다"고 비난했다. 북한은 특히 민씨 세력이 1884년 김옥균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을 좌절케 했다면서 이에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북한 백과사전은 갑신정변을 진보적이며 애국적인 성격을 띤 부르주아개혁으로서 조선근대사에서 획기적 의의를 갖는 사변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원군에 대해서는 왕권 강화, 국방력 강화, 쇄국정책 등 '봉건제도'의 확립을 위해 강력한 정책을 취했고 이것이 일정 기간 외세의 침입을 막았다는 점을 들어 다소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조선전사는 "대원군의 봉건적 개혁과 대외정책은 부르주아혁명을 수행하지 못한 봉건국가가 자본주의침략에 대항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의 효력을 발휘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전사는 또 대원군의 실각에 대해 백성들과 유리된 정책을 실시했고 개혁세력과 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서울=연합뉴스) 정연식기자 jys@yonhap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