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러 정상회담에서 "서울 방문에는 여건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그의 서울 답방이 당분간 실현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의 침체국면이 지속될 것으로 관측된다. 김 위원장이 지난해 남북정상회담에서 약속한 서울답방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언급한 여건은 무엇일까? 우선 그가 이번 모스크바 공식 방문중 밝힌 '서울 방문 여건'은 크게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로 나눠 볼 수 있다. 북측은 이번 모스크바 선언에 주한미군 철수론을 삽입하는 등 미국의 보수적 대북정책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대미 협상력 제고를 위한 압박 카드를 꺼내 들었다. 특히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견제하려는 러시아의 이해관계와 맞아 떨어지면서 미국의 북한 재래식 무기 감축 요구를 받아치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결국 김 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 '여건'은 북미관계에서 클린턴 미 행정부 때 공동 코뮈니케에서 합의한 '대북 적대시 정책 포기'를 재확인하고미사일과 핵문제 해결을 위한 공정한 대화재개로 볼 수 있다. 또 남북관계에서는 대북지원에 미지근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남측 정부에 대해자세 전환을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성대국 건설을 주장하고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 경제 활성화에 가장 필요한 요소가 전력문제이고 이 문제에 대한 남측의 적극적인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다 최근 남한사회 내부에서 일고 있는 대북 보수여론도 김 위원장이 언급한 '여건'에 포함될 것으로 추측된다. 북한측은 남북문제에 대한 야당의 정치공세와 국민들의 반북 감정이 만연한 가운데 김 위원장이 서울에 오게될 경우 남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지 못할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특히 체면과 자존심을 중시하는 북한으로서는 그같은 방문 여건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미 북측은 경협 등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남측 사업자들에게 이같은 입장을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한.미.일의 3국 정책공조에 대적할만한 북.중.러 3각 동맹을 복원해 지원세력을 등에 업고 가려할 것인 만큼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의 오는 9월중 평양방문이후에나 답방에 대한 검토가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 전문가는 "북한은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보수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사회 내의 보수여론 득세로 운신의 폭이 좁아져 있는 상황"이라며 "북한으로서도 이런 상황에서 김 위원장의 답방을 쉽게 결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측은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위한 여건도 필요하지만 답방을 통해 조성될 수 있는 남북간, 북미간 여건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악화된 북미관계등 국내외 전후 사정을 감안할 때 남북관계에 획기적인진전이 없을 경우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이 당분간 실현되기는 어렵다는게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견해이다. (서울=연합뉴스) 장용훈기자 jy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