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의 상봉은 너무나 짧았다.

한마디 말로 못한 채 뜨거운 눈빛만 건넨 만남이기에 애절함은 더했다.

꺼져가는 생명을 일으키며 반세기 동안 목메이게 기다리던 동생을 만났건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깨어난 운보 김기창(87)화백이 동생 기만(71)씨를 만났다.

김 화백의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기만씨가 김 화백이 입원중인 서울 삼성동 삼성서울병원 1902호실로 찾아가 상봉이 이뤄졌다.

기만씨가 병실에 도착한 것은 1일 오후 3시25분.

동생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김 화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만이로구나…"라고 외치고 싶었는지,입을 벌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지난 며칠동안은 그런대로 손짓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을 분명하게 알아보고 수화(手話)로 어지간한 뜻은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날은 손도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기만씨는 말도 못하고 병상에 누워있는 형을 보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형의 손을 부여잡고 "형님,기만이가 왔어요"라며 말없는 형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었다.

기만씨는 작은 수첩을 꺼냈다.

거기에 "개선장군이 돼 왔습니다"라고 적었다.

수첩을 형에게 보여주자 김 화백은 그저 눈물만 흘렸다.

만나자마자 또 떠나보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 듯 김 화백은 마지막 힘을 내 동생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기만씨는 자신이 떠난 뒤 형님의 옆에 두라며 ''태양을 따르는 한마음''이라는 조선화를 펼쳐 보였다.

김 화백의 아들 김완씨는 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작품 가운데 하나인 ''승무''를 기만씨에게 주었다.

반세기 만의 상봉은 불과 20분으로 끝났다.

김 화백의 건강상 오랫동안 긴장상태를 지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형님,곧 다시 올게요.그때까지 살아 있으라요"

자신없는 약속을 하는 기만씨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이 너무 격해지지 않도록 울음소리를 참고 있던 기만씨는 병실을 나서자마자 그만 엉엉 소리를 내며 울어버렸다.

서울 시립미술연구소 연구생이던 기만씨는 지난 51년 월북했다.

전쟁이 터진 뒤 운보는 부인 박래현(76년 작고)씨와 함께 처가가 있는 전북 군산으로 피했고 기만씨와 막내 여동생 기옥(74)씨는 38선을 넘었다.

북으로 간 기만씨는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현재 공훈예술가로 명망을 얻고 있으며 기옥씨는 의사가 됐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