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을 헤매다 간신히 깨어난 운보 김기창(87)화백이 목메이게 기다리던 동생 기만(71)씨를 만났다.

한마디 말도 못하고 손짓으로 몇마디 건넸지만 운보는 ''이제 여한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병석의 형님을 부여잡은 동생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1일 오후 3시10분 남북한의 대표적 동양화가인 형제가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1902호 병실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끊어져 가는 생명을 되살려 이뤄진 만남이기에 애절함은 더했다.

각종 질병이 겹친 노환으로 의식이 혼미해진 김 화백은 마지막 힘을 내 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며 손짓으로 몇마디 했다.

김화백은 뭔가 말하려는듯 입을 움직이려 했지만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뜨거운 눈빛으로 하고픈 말을 대신할 뿐이었다.

한참을 울먹이던 기만씨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는 "개선장군이 되어 왔습니다"라고 적어 형에게 보여주었다.

잠시후 마음이 진정되자 기만씨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꺼냈다.

"6폭짜리 병풍을 만들수 있어요.제목은 ''태양을 따르는 마음''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옆에다 두고 자기 대신 보라고 말했다.

두 형제의 만남은 25분만에 끝났다.

김 화백의 병세가 워낙 나빠 장시간 긴장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기만씨는 "형님,곧 다시 올게요.그때까지 죽지 말라요"라며 발을 떼려하지 않았다.

옆에서 상봉을 지켜본 김 회백의 아들 김완씨는 "아버지가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의식을 회복했고 손짓과 표정으로 감정을 표시할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며 "오늘의 상봉은 하늘의 도움"이라고 감격해했다.

이날 낮 개별상봉에서 김완씨는 작은아버지 기만씨에게 아버지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작품 ''승무''(71년작·6호)와 김해 김씨 족보 2권 등을 드렸다.

기만씨는 평양에 돌아가서도 형님을 대하듯 모시겠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지난 51년 서울 시립미술연구소 연구생이던 기만씨는 그해 월북,평양미술대학을 졸업했다.

65년에는 조선미술박물관 부장을 지냈으며 그의 작품 20여점이 조선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현재 공훈예술가로 활동중이다.

기창 기만 화백 형제는 51년 사상의 차이로 이별해야 했다.

중공군 개입소식을 들은 운보가 부인 박래현(76년 작고)씨와 함께 처가가 있는 전북 군산으로 피한 반면 기만씨와 막내 여동생 기옥(74)씨는 38선을 넘었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