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특별검사팀 옷로비 수사의 양상은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을 보면 최초의 발화점은 모피코트 보유 기간을 줄이려
고 한 연정희씨의 거짓말이었다.

이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 배정숙씨와 정일순 사장의 위증이 필요했다.

이들의 거짓말은 이 사건을 "실패한 로비와 관련된 해프닝"으로 처리해
버리려고 한 청와대 사직동팀과 검찰의 "정치적 의도"와 맞아떨어지면서
조사받는 자와 조사하는 자 모두를 집어삼키는 블랙홀로 변했다.

특검팀의 수사 초점은 "라스포사를 출입한 여인들"을 넘어 사건의 진상을
왜곡하고 은폐한 청와대 사직동팀과 검찰의 수사책임자들 쪽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특검팀의 눈길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청와대와 검찰에 불길이 옮겨 붙은 것만은 분명하다.

최초의 불씨를 만든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다.

만약 처음부터 검찰 내부와 국민여론 양쪽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모았던
검찰총장 김태정씨를 굳이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하지 않았다면 이런 사태는
없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일이다.

지난 1년 반 동안 김대중 정부를 정치적 곤경에 몰아넣은 여러 사건의
불씨가 대부분 김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영입한
"구 여권 인사"들에게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연속되는 "문건 파동"의 원인을 제공한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는 전두환씨
의 민정당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지만 오랜 기간 중앙정보부 간부로 일했던
인물이다.

뇌물수수로 부부가 "따로 또 같이" 구속당했던 임창렬 경기지사 역시
권위주의 시대 출세가도를 달렸던 경제관료 출신이다.

재.보궐 선거 돈잔치 의혹처럼 동교동계 정치인들이 일으킨 문제도 있긴
하지만 그 정치력 파괴력은 뇌물 사건이나 문건파동에 비할 바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최대 실책은 안기부의 정치개입과 검찰의 정치적 편향성에
대한 국민의 의심과 불신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김 대통령은 19일 우리 나라가 외환위기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선언했다.

경제연구소와 국제기구에서는 한국이 금년에 9% 수준의 경제성장을 이룰
것이라고 전망한다.

외환보유고는 정권 인수 당시의 약 스무 배인 6백억 달러를 넘어섰고
종합주가지수는 1천포인트를 넘나들고 있다.

실업률의 증가에 제동이 걸렸고 11월 금융대란설도 소리없이 가라앉았다.

99년 들어 경찰이 최루탄을 단 한 발도 터뜨리지 않았다는 발표도 나왔다.

"주사파의 대부"가 공개적으로 전향을 하고 대학가는 정치적 호전성을 거의
완전히 벗어던졌다.

야당이 연일 장외투쟁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국민경제와 사회 분위기가
빠르게 안정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도 16대 국회의원 총선을 불과 다섯 달 앞둔 지금 대통령과 집권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는 여전히 저조하다.

국민회의는 "단군 이래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룬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당의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어찌된 영문일까?

문제는 신뢰의 상실이다.

국민의 정부는 지금까지 정치개혁에 거의 완벽하게 실패했다.

정치개혁을 국회의원 정수를 줄이고 정치자금법을 고치고 선거구제를
바꾸는 등 정치권 그 자체의 변화로 한정하면 희망이 없다.

정치개혁은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조직과 기관에 제 자리를 찾아주고
민주적 통제 아래 두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반드시 기득권의 파괴를
동반한다.

그러나 여권 신당 추진위 2차 영입인사 명단과 창당 추진 경과를 보면
김대통령은 여전히 기득권의 파괴가 아니라 기득권층과 손잡고 내년 총선에
임할 작정인 듯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담으려다 초래한 각종의 "정치적 사고"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것일까?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22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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