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권 풍경은 끔찍한 악몽과 같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은 안기부 대공수사 국장 출신의 "야당 정보통"이다.

그래서 이른바 "언론대책 문건"을 근거로 중앙일보 사태가 계획된 시나리오
에 따른 언론장악 음모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그의 폭로는 특별한 무게를
가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문서를 작성한 장본인은 정의원이 지목한 이종찬
의원과 이강래씨가 아니라 중앙일보의 문일현 기자였다.

정의원에게 문서를 제공한 인물도 정의원의 말과 달리 이종찬 의원의 측근이
아니라 평화방송 이도준 기자였다.

이 기자는 문제의 문서를 "여당 정보통" 이종찬 의원의 방에서 빼냈다.

그런데도 정 의원은 이종찬 이강래씨가 책임자라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회창 총재는 사실적 근거가 없는 정의원의 "신념"을 확고한 근거로 삼아
"언론말살 규탄대회"를 여는 등 초강경 노선을 걸었다.

한나라당의 이 "확고한 신념"은 정의원이 이도준 기자에게 1천만원의 돈을
준 사실이 드러난 뒤에도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신념을 가지는 거야 탓할 바 아니다.

하지만 "사실"의 뒷받침이 없는 "신념"만으로 폭로전을 벌이는 그 배짱에는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다.

여야 "정보통"과 "민완기자"들이 뒤얽혀 만들어낸 이 사건은 괴이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선 "정보통"이라는 정형근 의원의 명성은 거품이다.

수상쩍은 방법으로 손에 넣은 출처불명의 문서를 가지고 정기국회를 파행
으로 몰아넣은 솜씨는 대단하지만 획득한 정보의 신뢰성과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은 보통사람에도 미치지 못한다.

앞으로는 이런 정도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 대공수사 국장을 맡는 비극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 다음은 이종찬 의원과 이도준 기자의 "특수한 관계"에 대한 의혹이다.

이 의원은 집권당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국가정보원의
최고책임자를 지낸 인물이다.

만약 평범한 기자가 마음대로 문서를 복사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사무실을 운영했다면 국가를 책임지겠다는 포부는 접어두는 것이 좋겠다.

평소 국정운영과 관련한 비밀 보고서와 문서를 주고받아 가면서 언론계에
자기 인맥을 키웠다면 21세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정치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최대의 미스테리는 이회창 총재의 태도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국 타개와 정치개혁을 위한 여야 총재회담을 제의한
상태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무엇인가.

수십년의 법관 경력을 가진 이 총재가 증거능력이 극히 빈약한 문서 한장에
휘둘리는 오늘의 사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것은 "악령"의 장난인지도 모른다.

반세기나 한국 정치를 지배했던 정보공작 정치의 악령이다.

한나라당은 모든 문제에서 "음모"의 악령을 본다.

재벌개혁은 "영남 기업 죽이기 음모"요, 비리 척결은 "야당 죽이기 음모"
이고, 중앙일보 사태는 "언론장악 음모"이며, 중선거구제와 정당명부제 등
선거제도 개혁은 "장기집권 음모"다.

폭로, 농성, 규탄대회 등 권력의 "음모"에 대한 투쟁은 모두 정당하기
때문에 파행국회에 대한 국민의 비판적 여론은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매사를 이런 눈으로 보는 정당에서 정형근 의원과 같은 "정보공작 전문가"
들이 주도권을 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야당만 나무라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번 "언론대책 문건" 파문에서
한나라당은 이성을 잃었다.

사실을 확인해 보기도 전에 정형근 의원이 문서를 조작했다든가 중앙일보
간부가 개입했다고 맞받아친 국민회의 쪽의 잘못을 들어 이러한 "이성의
상실"을 합리화할 수는 없다.

여권의 공작정치를 규탄하기 전에 한나라당 지도부는 자기의 눈을 가린
"공작정치의 악령"을 걷어내기 바란다.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1월 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