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안심하고 통화하십시오"

관련 부처 장관들이 대문짝 만한 신문광고를 낸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불법 도.감청 의혹 파문은 거센 소용돌이로 변했다.

전문가를 데려다 회의장 어딘가에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지
확인한 다음에야 회의를 시작한 전경련 간부들의 모습은 이 소용돌이의
사회적 파괴력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헌법은 사생활의 비밀 보호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다.

통신 비밀은 사생활 가운데서도 내밀한 부분에 속한다.

따라서 정당한 법률적 근거와 절차에 의거하지 않은 통신 감청이 헌법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통신은 또한 기업활동을 비롯한 공적 생활의 필수 요소다.

정보가 권력과 돈의 원천인 현대 사회에서 불법 도.감청은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파렴치한 반사회적 범죄라 하겠다.

야당 주요인사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도.감청 의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한나라당의 폭로는 통신 감청의 "정치적 오용"을 겨냥한 것이다.

국민의 기본권 보호는 그저 배경 그림에 불과하다.

그들이 진정 국민의 인권을 생각한다면, 우선 "어제의 여당"으로서
경험했던 도.감청 실태를 남김없이 밝혀야 마땅하다.

그렇게 하려면 알면서도 침묵했던 과거의 잘못을 국민 앞에서 고백하고
사과할 자세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

정부 여당의 대응도 옹색하기 짝이 없다.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정치적 목적의 불법
도.감청을 했다는 것을 들어 "어제의 여당" 한나라당을 공박하려면 먼저 그
실상을 밝혀야 한다.

"단군 이래 최초의 정권교체"로 집권당이 바뀌었다고 해서 대한민국 정부의
연속성이 없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정부가 국민의 통신 자유를 침해하고 정치적 목적의 통신 도.감청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이라도 정부가 국민에게 사과를 해야 옳지 않겠는가.

정부 여당은 이 문제의 특수성과 사회적 파괴력을 아직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하다.

통신 비밀의 침해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요 피해 당사자도 그 사실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종류의 인권 침해다.

불법 연행이나 감금, 구타와 고문, 검열 등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인권 유린과는 전혀 다르다.

실제로 수사기관에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누군가 자기의 전화와
팩스와 전자메일을 엿듣고 엿볼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실정법과 도덕률을 완벽하게 지키면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털면 누구나 먼지가 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세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기업인은 드물다.

촌지와 뇌물, 정치자금과 뇌물을 두부모 자르듯 구분할 수 없는 만큼,
국회의원을 비롯한 선출직 공직자는 물론이요 일반 직업공무원들도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이다.

법률 위반은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떳떳하지 않은 행위를 했거나, 어느
나라 대통령처럼 누군가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법률과 도덕을 더 잘 지키게 되면 좋지 않으냐고 반문할 이가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사람은 감시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모두가 법률과
도덕을 완벽하게 지키는 사회와 불법적 도.감청이 없는 대신 더러 불법적
비윤리적 행위가 저질러지는 사회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온 나라를 바닥 모를 불신과 불안의 도가니에 빠뜨리는 도.감청 의혹
난기류를 빨리 걷어내야 한다.

여야 총재가 머지 않아 무릎을 맞댄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정말로 효과 있는 불법 도.감청 방지 대책을 세워 줄지는 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 시사평론가.성공회대 겸임교수 denkmal@hitel.net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0월 25일자 ).